'사실혼' 배우자에 건보 혜택, '동성혼' 안된다?[세상을 바꿀 법정]

③ 대법 전원합의체, 23일 세번째 심리 기일
"남녀 결합과 본질적으로 달라" vs "본질 같아, 사회 복지 평등해야"

편집자주 ...판결은 시대정신인 동시에 나침반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법정에서 나침반의 방향을 돌려놓을 사건들이 계속 논의되고 있다. '세상을 바꾼 법정' 시리즈를 통해 과거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대체됐는지를 살펴본 데 이어 '세상을 바꿀 법정' 시리즈를 통해 나침반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짚어봤다.

결혼 5년차 동성커플 소성욱 씨와 김용민 씨가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 상대 보험료 부과 취소 처분 소송 항소심 선고 직후 사랑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 2023.2.21/뉴스1 ⓒ News1 구진욱 기자

(서울=뉴스1) 임세원 기자 = "취지는 공감하지만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차별금지법·동성혼 법제화에 대한 법조인들의 공식 입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최근 2년 사이 임명된 조희대 대법원장, 이종석 헌법재판소장, 권영준·신숙희 대법관과 정정미·김형두 헌법재판관은 후보자 시절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이같은 취지로 답했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답변의 속뜻은 시원치 않다. 소수자의 권리는 다수의 합의가 있어야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합의가 없는 현재로선 불가능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도 시기상조의 혜택이 된다.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은 올해로 34번째 해를 맞았다. 세계보건기구가 동성애를 질병 목록에서 제외한 것을 기념해 1990년 5월 17일 제정됐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권리는 이날이 제정된 지 3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한 시기상조로 남아있다.

◇사실혼 배우자도 가능한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1심 "동성은 안된다"

혼인은 물론 동성 커플이 하나의 '결합'으로서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에 대한 합의도 '일시 정지' 상태다. 동성 배우자를 건강 보험 피부양자로 인정받기 위한 소성욱·김용민 씨 부부의 재판은 4년 3개월째 진행 중이다.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오는 23일에 이 사건 세 번째 전원합의체 심리 기일을 열고 소 씨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료 부과 처분 취소 소송을 심리한다.

건보공단은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도 피보험자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건강 보험 자체가 모든 국민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보장제도의 하나인 만큼 보다 폭넓게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소 씨는 6년의 연애 끝에 2019년 김 씨와 결혼식을 올린 뒤 건강 문제로 퇴사했다. 2020년 2월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인 김 씨의 피부양자로 등록됐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건보공단은 소 씨의 피부양자 자격을 취소하고, 지역가입자로 전환해 보험료를 새로 청구했다.

이에 소 씨는 2021년 2월 건보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 재판부는 소 씨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법이 말하는 사실혼은 남녀 결합을 근본으로 하므로, 동성 결합과 남녀 결합을 본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앞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례로 보아 혼인은 남녀의 결합이 근본 요소여서 '사실혼' 자격이 없는 소 씨 커플은 사회보장을 지원받을 수 없다는 의미다.

또한 동성 결합은 남녀의 결합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남녀 사실혼과 달리 취급하는 것은 헌법상 평등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봤다.

◇2심 "동성 결합, 남녀 결합과 본질적으로 같다…소수자 보호는 법원 책무"

하지만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도 원심과 마찬가지로 현행법상 동성 커플을 사실혼 관계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봤다. 이에 동성 부부 배우자 대신 '동성 결합 상대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재판부는 동성 커플은 성별을 제외하면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라는 면에서 남녀의 사실혼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이며, 그간 건보공단 재량으로 사실혼도 피부양 자격을 인정하고 있었다면 동성커플에게도 평등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봤다.

또한 "사실혼은 법률혼에 준하는 보호를 할 필요가 있는 신분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발전한 것"이라며 "혼인의 의사로 부부공동생활을 하는 동성 커플은 오히려 인권의 측면에서 법적 보호의 필요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건보공단은 합리적 이유 없이 원고를 사실혼 배우자와 차별해 피부양자 자격을 박탈했다"며 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아래와 같은 내용을 적시하기도 했다.

"누구나 어떠한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이기도 하다."

일본 도쿄지법은 동성 커플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했지만, "동성 가족에 대한 법적 보호 부족은 '위헌상태'"라고 판결했다. 이에 원고 등이 환영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22. 11. 30. ⓒ AFP=뉴스1 ⓒ News1 최서윤 기자

◇동성혼 인정 않는 홍콩·일본…동성 커플에 사회보장권 인정 판례도

항소심 법원이 동성혼이 합법화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동성 커플에 전향적인 판결을 한 것일까.

인권 단체 국제앰네스티가 지난 2월 대법원에 제출한 의견서에 따르면 동성혼이 공식 인정되지 않았으나 동성 커플에게 사회보장 정책에 대한 평등한 접근을 보장해야 한다고 판단한 국가들이 있다.

홍콩 대법원은 2018년 한 영국인 여성이 홍콩 노동 비자를 가진 동성 파트너의 '피부양자' 자격으로 비자를 신청했으나 이민청으로부터 거절당한 'QT 대 이민청장' 사건에서 동성 커플의 손을 들어줬다. 비자 정책 목적상 이들을 이성 커플과 달리 취급한 것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이라고 본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도 홍콩은 2019년 6월 '룽춘퀑' 사건에서 "타국에서 법적으로 결혼한 동성 커플의 경우, 결혼한 이성 커플과 동일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만장일치로 인정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일본 대법원이 올해 3월 원칙상 법률혼·사실혼 배우자에게만 지급할 수 있는 범죄피해자구조금을 동성 커플 상대방에게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하며, 이를 달리 판단한 나고야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나고야 고등법원으로 환송했다.

대법관들이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공동취재)2023.5.11/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전원합의체 결론 언제 날 지는 미정…수년 걸릴 수도

소 씨의 사건이 대법에 머무른 지는 이번 달로 1년 2개월째다. 다만 대법원 전원합의체 심리는 사건에 따라 수년이 걸리기도 해 언제 결론이 날지는 알 수 없다.

건보공단은 "동성 결합은 본질적으로 남녀 간 결합과 다르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혼인 상대에게만 인정했던 피부양자 자격을 '사실혼' 자격도 갖출 수 없는 동성 부부에게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 씨를 대리하는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국가라면 개인에 대한 차별을 용납해선 안 된다"며 "동성 커플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권리도 주지 않는 것은 차별"이라고 주장한다.

이어 "최근 일본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판결이 있는 등 세계적으로 동성 커플의 사회보장 권리에 대해 논의가 나오고 있다"며 "우리나라에서 동성 커플의 권리를 다루는 사건이 대법원에까지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사회보장기본법 제2조에는 "사회보장은 모든 국민이 다양한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향유할 수 있도록 자립을 지원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 중 '모든 국민'의 범위를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지는 '인권 최후의 보루'인 대법원에 달렸다. 아직 합의되지 않아서, 아직 법이 없어서 시기상조라며 미루는 동안 비슷한 상황의 다른 국가는 한발 앞서 나가고 있다. 이미 만시지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