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고문…'소멸시효' 지나 배상 못받는다?[세상을 바꾼 법정]㉖

헌재, '불법행위 기준 5년 내' 장기소멸 시효 위헌 결정
관성적으로 불복하는 정부…"국가배상법 별도 소멸시효 둬야"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모습. 2023.9.26/뉴스1 ⓒ News1 김도우 기자

(서울=뉴스1) 임세원 기자 =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상처가 있다. 누군가가 이러한 상처를 입힌 경우, 우리는 금전적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손해를 입힌 주체가 국가일 때 국민은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국가배상청구권은 일반 손해배상과 달리 헌법에 의해 기본권으로 보장받는다. 국가가 보호해야 할 국민에게 도리어 손해를 입혔을 때 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할 권리를 우리나라 최고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권리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권리 자체를 '소멸'당한 이들이 있다. 일정 기간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경우 이를 박탈하는 소멸시효 때문이다.

◇ 헌재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국가폭력 과거사에 '장기소멸시효' 위헌

2018년 8월 헌법재판소는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과 국가가 중대하게 인권을 침해한 사건에 대해서는 '민법상'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것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했다. 사건이 특수해 일반적인 손해배상 청구에 적용되는 소멸시효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국가배상법은 소멸시효에 관한 민법 제766조를 적용해 국가 폭력 피해자들이 손해 및 가해자를 인식하게 된 시점으로부터 3년 이내(단기소멸시효), 혹은 불법행위가 있었던 시점으로부터 5년 이내(장기소멸시효)에 국가 배상을 청구하지 않으면 청구권을 박탈했다.

헌재는 그중 불법행위 시점을 기준으로 한 장기소멸시효가 헌법에 어긋난다고 봤다. 국가 폭력은 특정한 시점에서 끝나지 않고 사후에도 조작·은폐하기 위한 국가적 움직임이 있었기에 오랜 기간 배상을 청구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헌재는 "국가가 초헌법적인 공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조직적으로 일으킨 중대한 기본권 침해를 구분하지 않은 채, 일반적인 국가배상 사건에 대한 소멸시효 정당화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헌법상 평등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 후 사고 발생 후 ‘너무 늦게’ 배상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도 구제의 길이 열렸다. 피해자가 국가 폭력의 희생자로 확정됐다는 사실을 국가로부터 통지받지 못해 오랜 시간이 소송을 못한 경우다.

지난해 12월 대법원은 1951년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이 사건은 시기와 내용 및 성격상 불법적으로 이뤄진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에 해당한다"며 유족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은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돌려보냈다.

2020년에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이 반공 단체 '울산 보도 연맹' 소속 민간인 870여명을 집단 총살한 사건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취지로 판결했다.

제주 4·3사건 발생 74년 만에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첫 보상금 지급이 이뤄진 7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4·3희생자 첫 보상금 지급 기념식'에서 유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2.11.7/뉴스1 ⓒ News1 오현지 기자

◇ 계속해 불복하는 국가…이미 위헌인 '장기소멸시효'도 주장

하지만 모든 과거사가 구원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배상의 주체인 법무부가 각종 이유로 피해자의 배상 청구에 불복하고 있어서다.

지난 2021년, 3만명에 이르는 인원이 학살된 제주 4·3사건 당시 억울하게 사형당한 고(故) 김호근씨의 유족은 제주지방법원에 국가배상을 청구했다.

법무부 산하의 정부법무공단은 위헌 결정이 나지 않은 단기 소멸시효를 걸고넘어졌다. ‘손해 및 가해자를 인식한 때로부터 3년'이라는 기준 때문인데, 이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지에 따라 권리 구제 여부가 갈린다는 것이다.

공단은 유족들의 청구에 대해 "2000년경 '4·3 특별법'이 제정됐고, 당해 말에는 관련 보고서도 발간됐으니 늦어도 12월 무렵에는 불법행위를 알았다고 봐야 한다"며 3년의 단기소멸시효가 이미 끝났다고 주장했다.

이미 위헌 결정을 받아 민법상 사라진 장기소멸시효도 불복의 근거로 삼았다. 사건 종료 시점인 1954년 9월21일로부터도 5년이 훨씬 지났다는 것이다.

2023년, 5·18 당시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고 가혹행위를 당한 박만규씨의 소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답변을 내놨다. 공단은 "박씨가 가혹 행위에서 해방된 1983년 12월에는 손해와 가해자를 알았을 것인데 이로부터 3년, 프락치 강요가 있었던 시점인 1983년으로부터 5년이 이미 지나 손해배상청구권이 시효완성으로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법무부가 2023년 9월13일에 개최된 제54차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 일부

◇ "국가배상청구권에 별도의 규정 둬야" 전문가 제언도

그러나 이같은 불복을 거듭하면서도 법무부는 지난 9월13일에 진행된 제54차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의견서에 이와 같이 진술했다.

"2018년 8월 헌법재판소는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에 장기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했고, 대법원도 이를 관련 재판에 적용하고 있다. 법무부는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가 장기소멸시효로 인해 자신의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배상청구 소송에 관여하는 정부 기관이 위 헌법재판소 및 대법원 결정을 존중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최정규 변호사는 이에 대해 "보고서 내용과 달리 정부법무공단은 버젓이 헌재와 대법원 판결을 어기고 장기 소멸시효를 주장하고 있다"며 "헌재 결정이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 것은 큰 문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법무부의 불복이 국가에 책임을 돌리지 않으려는 관성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최 변호사는 중대한 국가폭력 사건에 대한 국가배상청구에 대해서는 별도의 소멸시효 규정을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가배상소송은 정보의 비대칭이 심각해 개인이 모든 요건을 입증해야 한다는 특수성이 있다"며 "궁극적으로는 국가배상법 자체의 소멸시효 조항을 별도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가 국가기관의 권고를 무시하고 유일한 구제 수단인 국가배상소송으로 피해자를 내모는 것도 모자라, 국민의 권리가 소멸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빠른 시정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say1@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