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 없다"는 말에 돌변 시작된 폭행…"가짜 약 팔았지"[사건의 재구성]

ADHD 치료제 거래 중 사기 당했다는 생각에 너클형 흉기 휘둘러
"방검복 입고 흉기 사전 준비"…징역 5년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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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김예원 기자 = '역지사지'. 상대방과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바꿔서 생각하라는 사자성어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의미다. 하지만 2021년 12월의 A씨에겐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그가 집을 나서기 전 이 네글자를 떠올렸다면 끔찍한 참사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20대 남성인 A씨와 30대 남성 B씨는 약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2021년 6월 A씨 ADHD(주의력 결핍 과다행동 장애) 치료제로 흔히 사용되는 의약품을 판매한다는 온라인 게시글을 보고 B씨에게 연락했다.

몇 차례 거래로 유지되던 인연은 2개월 뒤 끝이 났다. A씨가 "약이 가짜"라고 주장하며 B씨와 몸싸움을 벌인 까닭이다. A씨는 B씨에게 800여만원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그를 경찰에 신고했다. B씨는 A씨의 연락을 차단했다.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A씨는 복수를 결심했다. A씨는 새 휴대전화를 개통 후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B씨에게 약 구매 문의를 넣었다. 2021년 12월 17일 오후 7시. 예전에 B씨를 만났던 지하철 역에서 약속이 잡혔다. A씨는 방검복을 입고 너클형 흉기를 든 채 집을 나섰다.

"여기 폐쇄회로(CC)TV 있나요?"

서울의 한 지하철역 장애인 화장실. A씨는 없다는 B씨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장실 문을 닫고 주먹을 휘둘렀다. B씨가 저항하자 흉기를 꺼내 몸 구석구석을 찔렀다. B씨는 주위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외상성 안면신경 마비 등의 상해를 입었다.

A씨는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의외의 사실은 A씨가 한 때 사기 가해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2020년 7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전자기기 등 판매글을 온라인에 게시하고 159만원 가량의 돈을 편취한 전적이 있었다.

A씨는 B씨의 신체를 의도적으로 공격한 게 아니기 때문에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평소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고 있던 사실을 들어 범행 당시 심신 미약 또는 상실 상태였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살인 목적 또는 계획이 없어도 자신의 행위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고의성은 충분히 입증된다는 이유에서다.

범행 당시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주장도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A씨가 우울증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긴 했으나 사전에 방검복 및 너클형 흉기를 준비한 점, CCTV 설치 여부 확인 후 범행을 저지른 점을 고려하면 심신미약 또는 상실 상태로 보긴 힘들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다만 A씨가 이전에 살인 및 폭력 범죄를 저지른 전력이 없는 점, 형 집행 종료 후에도 3년 간 보호관찰을 받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장래에 다시 살인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은 없다고 판단해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명령청구는 기각했다.

kimyew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