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시민 인정한 첫걸음…주택청약 등 빗장 마저 열리길"
"피부양 자격 인정" 법원 판결에…동성 커플 "환영"
"사실혼 관계 인정 안해 아쉬움…기존 해석 얽매여"
- 한병찬 기자
(서울=뉴스1) 한병찬 기자 = "너무 반가운 판결입니다. 무지개 깃발을 가게에 걸어두려고 합니다."
22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김모씨(41)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게에 깃발을 묶으려는 그의 손은 분주했다. 강풍에 몇 번이나 깃발이 떨어졌지만 그는 끈을 꽉 조여 고정했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그는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를 지우기 위해 노력했던 많은 발걸음이 보상받은 기분"이라며 "환영할 만한 판결"이라고 밝게 웃었다.
동성커플에게 국민건강보험 직장가입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에 동성 커플들은 반가움과 기대의 목소리를 냈다.
이번 판결의 가장 큰 화두는 평등 원칙이었다. 법원이 사실혼을 인정하진 않았지만 평등 원칙을 강조하며 동성 커플도 이성간 사실혼 부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달리 취급하는 것은 차별이라고 판시한 것이다.
동성 연인과 1년 반째 연애 중인 안모씨(30)는 "우리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우리나라에서 성소수자 커플은 언제나 법 보호의 테두리 밖에 있었는데 동성 커플을 법 안에 포함하는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다"고 반겼다.
지난해 1월 1심부터 관심 있게 지켜봤다는 동성 커플 이모씨는 "이렇게 빨리 원고 승소 판결이 나올 줄 몰랐다"며 "동성 부부가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성 부부와 다른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기초적인 합의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인상 깊은 판결이었다"고 소감을 털어놓았다.
이씨는 몇 년 전 큰 사고를 당해 응급실에 갔던 경험도 들려주었다. 당시 이씨는 보호자가 필요한 긴급 상황이었지만 동성 애인은 어디까지나 친구 관계여서 보호자로 부를 수 없었다. 결국 지방에 계시는 부모님이 서울로 와서 의료 동의를 해야 했다.
이씨는 "응급실에 실려갔는데도 애인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불합리했다"며 "커밍아웃으로 가족과 단절된 경우가 많은 성소수자에게 정말 필요한 판결"이라고 울먹였다.
동성 애인과 2년째 만나고 있는 20대 정모씨는 "승소 판결에 마냥 감사했다"며 "파격적이면서도 당연한, 역사에 남을 멋진 판결"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씨는 "이번 판결을 시작으로 주택청약, 신혼부부 지원 등 성소수자에게 닫혀 있는 빗장이 열리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동성부부 관계를 사실혼 관계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에는 작은 아쉬움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재판부는 "민법상 혼인의 본질을 이성인 남녀간 결합으로 보고 있다"며 소성욱씨(32)와 배우자 김용민씨(33)가 사실혼 관계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의 사실혼 관계 주장 기각은 헌법 제36조1항과 2011년 대법원의 판례, 1997년 헌법재판소 판례에 근거한다. 이 때문에 하급심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례를 뒤집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안씨는 "동성 배우자와 이성 배우자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판시했는데 사실 대법원 판결을 변경하지 않으면서도 우회적으로 사실혼 관계를 인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헌법재판소의 과거 결정이나 민법의 해석이 지금도 적합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씨는 "헌법 제36조 1항의 핵심은 양성이 아닌 존엄과 평등"이라며 "입법자들이 강조한 혼인의 본질이 존엄과 평등이라면 동성혼을 인정하는 것은 헌법에 반하는 것이 아닌 헌법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씨도 "'혼인은 남녀간 결합'이라는 명시적 문구가 법전 어디에도 없으며 단지 헌법 몇 줄을 주관적으로 유추 해석한 것일 뿐"이라며 "기존 법률 해석에 법원이 지나치게 얽매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들이 판결을 반기면서도 작은 아쉬움을 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가 이들의 목을 죄어오기 때문이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괴롭힘을 경험한 청소년 성소수자 중 80%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19%는 극단 선택을 시도했다고 털어놨다. 인권단체 다움이 지난해 공개한 보고서에도 청년 성소수자 41.5%가 1년 동안 극단 선택을 생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성 커플들은 이번 판결을 시작으로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소중한 성소수자 친구를 극단 선택으로 잃은 안씨는 '차별금지법'을, 동성 애인과 미래를 그려나가고 싶은 이씨는 '생활동반자법'을, 아이를 좋아하는 정씨는 '동성부부의 입양'을 소망하고 있다.
bcha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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