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참살' 재동에서 헌재의 '내란' 재판…역사의 아이러니[부동산백서]
'피를 재로 덮은 마을' 재동…계유정난 참살·치유의 제중원 의미 교차
- 조용훈 기자
헌법재판소(헌재)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절차에 돌입했습니다. 첫 변론 준비기일은 오는 27일 열립니다. 국가적 혼란 사태를 수습할 마지막 책임이 헌재로 넘어간 셈입니다.
(세종=뉴스1) 조용훈 기자 = 헌재가 자리한 재동은 아이러니하게도 권력과 역모가 공존하고, 회복이 깃든 터입니다. 계유정난(1453년)으로 다수의 중신이 참수당해 피를 흘렸고,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1884년) 중심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서양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앞두고 이런 역사를 품은 재동 헌재로 전 국민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습니다.
지난 1988년 9월 15일 문을 연 헌재는 당시 독립 청사가 없어 중구 정동 정동빌딩(정동회관)을 청사로 사용했습니다. 같은 해 12월부터는 중구 을지로 옛 서울대학교 사대부고 건물을 개조한 을지로 청사에서 1993년까지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이후 1993년 6월에 와서야 지금의 재동 독립청사(연면적 1만 9270㎡)를 갖게 됐습니다.
헌재 구술 기록관에 남겨진 변정일 전 사무처장의 녹취문을 보면, 변 처장은 "당시 재동 부지를 놓고 헌법재판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서울시교육위원회, 종로구청 등 네 군데가 경합했었다"고 전했습니다.
헌재의 주소지인 재동(齋洞)은 '재(灰)를 덮은 마을'이라는 잿골(회동, 灰洞)에서 유래됐습니다. 단종 1년인 1453년, 왕위를 넘봤던 수양대군은 단종을 보필하던 원로대신 황보인, 김종서 등 수십 명을 숙청하는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당시 참살로 중신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비린내가 진동해 마을 사람들이 집에 있던 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고 해 잿골이라 불렸습니다.
개화와 근대 국가를 목표로 한 정치적 투쟁이었던 갑신정변과도 인연이 있습니다. 재동 터는 개화파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정변의 주역이었던 홍영식의 집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홍영식 집안은 멸문에 이르고 집은 폐허가 됐습니다.
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서양병원인 제중원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1885년 4월 개원한 제중원은 미국인 선교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의 건의로 건립됐습니다. 그는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한 인물로, 그 일로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었습니다. 제중원은 설립 당시에는 '은혜를 널리 펼치는 집'이라는 광혜원(廣惠院)으로 불렸지만, 곧 '백성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의미의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헌재는 앞으로 180일 안에 현 정권의 명운을 결정짓게 됩니다. 대통령 탄핵 심판은 노무현 전 대통령(2004년 5월 14일), 박근혜 전 대통령(2017년 3월 10일)에 이어 세 번째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이 추운 날씨 거리에 나선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대통령 탄핵을 외치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는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통치행위로, 국가 기능을 정상화하기 위한 것"이라 강변하며 내란죄 혐의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지난 3일 저녁 대한민국 전역에 내려진 비상계엄의 선포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모두 헌재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김형두 헌재 재판관의 말처럼 '신속하고 공정한 탄핵심판'이 이뤄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제 재동의 터를 잡은 헌재의 시간입니다. 모두가 승리하는 길을 가느냐, 패배하는 길을 택하느냐를 가르는 역사적인 갈림길에 섰습니다.
joyonghu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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