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유린 비상계엄 그날밤, 제2의 장태완은 왜 없었나[기자의 눈]
- 허고운 기자
(서울=뉴스1) 허고운 기자 = 우리 군이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여야 정치인 체포를 시도한 충격적인 12·3 '비상계엄의 밤'이 열흘 넘게 지났으나 후폭풍은 더욱 커지고 있다. 비상계엄이 치밀하지는 못했더라도 이미 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는 점이 계속 밝혀지고 있지만 그날 밤 우리 군엔 '제2의 장태완'이 없었던 것 같다.
고(故) 장태완 장군은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을 맡으며 정병주 특수전사령관, 김진기 육군헌병감 등과 함께 끝까지 저항했다. 그는 자신을 회유하려 드는 신군부에 "마, 너희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라고 외친 뒤 전황을 뒤집으려 노력했다. 장 장군은 12·12 군사반란을 막는 데는 실패했지만 국민과 정의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군인정신이 이 땅에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 이진우 전 육군 수도방위사령관 등 이번 비상계엄의 핵심인물로 꼽히는 이들은 하나 같이 "비상계엄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라며 '내란 음모' 혐의를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지휘관들은 '부하들에게 총기·실탄은 휴대하지 않고 국민 안전을 중시하라고 지시했다. 불법행위가 없도록 노력했다. 지시를 거부했어야 했다."라며 자신들이 '소극적 가담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부당한 명령을 제대로 거부하고, 헌정을 유린하는 군을 바로잡는 데 나선 군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제2의 장태완이 없었던 이유는 '군인은 명령에 따라야 한다'라는 심리 때문으로 보인다. 여 전 사령관은 "장관(김용현)의 명을 받고 명령을 이행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이로 인해 빚어질 제반 결과 사이에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결국 군인으로서, 지휘관으로서 명령을 따랐다"라고 말했다.
김용현 전 장관은 비상계엄 이후 전군 주요지휘관들에게 모든 군사활동은 본인이 책임질 예정이며, 명령에 불응하면 항명죄가 된다고 겁박했다. 지휘관들도 두려웠을 것이다. 항명죄를 받으면 군생활이 끝나는 것은 물론 전시에는 총살이다.
사실 김용현 전 장관도 자신의 명령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점을 알았기에, 제2의 장태완이 등장할 것을 걱정했을 수 있다. 그는 장관 후보자 시절인 9월 2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에서 과연 계엄을 한다고 하면 어떤 국민이 용납을 하겠나, 또 우리 군이 과연 따르겠는가, 저라도 안 따를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군인은 무조건 명령을 따른다'라는 명제가 과연 시대에 부합한 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군인이라고 본인의 생각 없이 모든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법을 어기고 국민을 배신하는 명령이라면 단호히 거부하고 맞설 수 있어야 '국민의 군대'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다.
"계엄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라는 707특수임무단 김현태 단장의 말은 우리 군의 현실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번까지 총 16회의 계엄이 이뤄졌고, 군 내에 계엄 관련 조직이 있는 데도 대부분의 군인은 계엄에 경각심이 없었거나 계엄 관련 교육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국방부는 '장병 정신전력 강화'를 강조해 왔다. 담당 병과 명칭도 '정신(精神)'을 강조하는 '정훈'(精訓)으로 바꿨다. 그러나 적과 싸워 이기는 대적관을 주입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국민을 위한 군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교육은 소홀했던 게 아닌지 의심된다.
만시지탄이지만 12·3 비상계엄 사태가 우리 군 모든 장병에게 '국군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라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기회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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