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브리핑]美서 태어난 최초의 한국인 '이화손'을 아시나요?
조선의 4대 주미공사 이채연의 아들…생후 2달여만에 사망
워싱턴DC 오크힐 공동묘지 내 펠프스 가족묘 구역에 묻혀
- 김현 특파원
(워싱턴=뉴스1) 김현 특파원 = 미국 워싱턴DC 조지타운대학교 인근에 있는 '오크 힐 공동묘지(The Oak Hill Cemetery). 새 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한 이곳 묘지에는 수많고 다양한 미국인들의 묘비가 있었다.
묘지 입구에서 350m 정도 걸어 내려가니 가족묘지로 보이는 부지의 한쪽 모퉁이에 하얀색 돌로 세워진 조그마한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묘비 뒤에는 무궁화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무궁화나무 탓인지 깨끗한 앞면과 달리 뒷면엔 이끼가 끼어있었다.
묘비의 주인공 이름은 'Ye Washon(1890년 10월12일~12월17일)'이었다. 묘비 뒤편엔 흐릿하지만 한글로 '조선 니화손'이라는 궁서체 형태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어쩌면 한국인 최초 미국 시민권자가 됐을지도 모를 조선인 아기의 무덤이었다.
◇美서 태어난 최초의 한국인…생후 두 달 닷새 만에 사망
이화손은 조선의 제4대 주미공사(대리)였던 이채연(1861~1900)과 그의 성주 배씨의 아들이다. 이화손은 '화성돈(華盛頓·워싱턴의 음차)에서 태어난 자손(子孫)'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화손은 미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한국인이었지만, 두 달 닷새라는 짧은 생만 살고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사인은 습진(Eczema)이었지만, 면역력 결핍에 따른 사망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조선인 아기 이화손의 출생과 사망 소식은 미 언론에서 다뤄질 정도로 주목받았다.
당시 미국 뉴욕에 기반을 둔 매체였던 '이브닝월드'는 1890년 10월13일자 신문에 '미국에서 태어난 첫 조선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 작은 아기가 장차 자라나 미국을 좋아했으면..."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헤럴드(Los Angeles Herald)'는 이화손의 사망 후인 1890년 12월24일자 신문에 "조선인 대리공사 이채연의 어린 아들이 사망했다. 그 아이는 지난 10월 워싱턴DC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태어난 도시의 이름을 따서 '이화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라고 보도했다.
◇짙은 슬픔 배인 묘비…엄마가 써 내려간 '조선 니화손'
양지바른 곳에 있는 이화손 묘비의 이면에는 짙은 슬픔이 배어 있다.
1일(현지시간)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관리하고 있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강임산 미국사무소장에 따르면, 비석 뒷면에 곱게 써 내려간 궁서체 형태의 '조선 니화손'이라는 문구는 이화손의 엄마인 배씨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자식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고스란히 새겨 넣은 것이다.
이화손이라는 이름이 '워싱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의미만 담고 있는 것을 보면 단지 묘비에 새겨 넣고자 지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화손이 사망한 다음 날(1890년 12월18일) 매장된 것을 보면 그의 부모는 사전에 죽음을 예감하고 이를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 소장은 "갓 태어난 아이를 잃고 붓을 들어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어땠겠냐"며 "특히 아이의 이름은 장차 아이의 미래를 축원하는 뜻을 담아 짓는데, 아이의 주검 위에 세워질 비석에 새겨 넣고자 이름을 지어야 했던 것을 보면 더욱 슬퍼진다"라고 말했다.
이화손은 사망한 뒤 당시 공사관이 있던 로건서클에서 직선으로 약 1.5마일(약 2.5km) 거리에 있던 오크 힐 묘지로 옮겨졌다.
짧은 생을 살고 간 이화손 묘의 존재는 100년 넘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있었다. 이화손 묘의 존재는 사망 124년이 지난 2014년에 확인됐고, '이화손'이라는 한글 이름도 묘비 뒷면의 이끼 등을 제거한 2019년 5월에서야 발견됐다.
◇美외교명문가 가족묘에 묻힌 이화손…美국무 사무총장이 신원보증
이화손의 묘는 오크 힐 공동묘지 부지내 군인이자 외교관 출신이었던 세스 L. 펠프스(1824~1885)의 가족묘에 자리 잡고 있다.
남북전쟁 당시 해군장교로 복무했던 펠프스는 북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장군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웠고, 군에서 은퇴한 후엔 정치인과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885년 펠프스가 사망하자, 이곳에 가족묘지가 조성됐다. 이 가족 묘지에 처음 묻힌 이는 펠프스였고, 2번째가 바로 이화손이었다. 펠프스의 가족묘엔 미 해군으로 2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에 참전했던 인사(Robert John Slagler·1916~1996)도 안장돼 있다.
이화손이 이곳에 묻힐 수 있었던 것은 펠프스의 사위였던 세블론 브라운(Sevellon A. Brown·1843~1895) 전 국무부 사무총장(Chief Clerk·1873~1888)의 도움 덕분이었다. 브라운 전 총장은 이화손이 장인어른의 가족 묘지에 묻힐 수 있도록 신원보증까지 해줬다.
이채연이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의 공사(1890년 9월~1893년 6월)이긴 하더라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보수적인 장묘 제도를 감안하면 이방인 자녀의 주검을 선뜻 받아줄 정도로 브라운 전 총장은 '친(親)조선 인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채연은 귀임을 앞둔 1893년 1월 친필 서명과 우정의 메시지(For my Friend Mr. Sevellon A. Brown, WashingtonDC)를 적은 자신의 전신 사진을 브라운 전 총장에게 주기도 했다.
여기엔 아들의 묘지까지 마련해 준 브라운 전 총장에 대한 고마움까지 담겨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 소장은 "냉정한 외교현실을 초월한 배려와 존중의 인간애"라고 말했다.
브라운 전 총장은 장인에게서 물려받은 집을 조선에 내어준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은 1889년 2월부터 그 집을 공사관 건물로 임대사용했다. 이채연이 공사로 재임하던 시기였던 1891년 고종은 2만5000달러를 들여 이 집을 매입했다. 이는 조선의 외교부 반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화손 묘지,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시작된 한미 관계의 한 역사
당시 이채현 공사와 브라운 전 총장의 우정은 초창기 한미 관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조선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오늘날 한미관계의 시작이다. 조선은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 미국과의 외교를 통해 국력을 강화하고 자주적인 개혁·개방을 시도하려 했다. 그 노력의 결정체 중 하나가 대한제국(조선)공사관이었다.
이채연은 공사 임기를 마치고 조선에 돌아와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과 한성전기회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워싱턴DC에서 선진문물을 봤던 그는 서울에 전기·수도·전차·철도를 도입하고 도로를 정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공사 재임 당시 인연을 맺었던 미국 인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처럼 미국의 한 외교명문가 가족묘에 자리 잡은 이화손의 묘지는 당시 조미 관계부터 지금의 혈맹으로 이어진 한미 관계의 역사가 녹아 있다.
강 소장은 "외교 사전에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것을 감안하면 워싱턴DC의 한 외교명문가 가족묘에서 발견된 이화손 묘지는 비현실적이고 동화같은 얘기"라며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1890년 당시 조선과 미국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화손 묘비 뒷면에 다시 끼는 이끼가 마음에 걸린다.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복귀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gayunlov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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