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브리핑] 韓, 美주도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 참여 딜레마
한미,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 관련 협의 개시…정부는 극도로 언급 자제
정부 내에선 한미관계 내세워 불가피론도…'中공장 운영' 韓 기업 등은 강한 우려
- 김현 특파원
(워싱턴=뉴스1) 김현 특파원 = 미국이 주도하는 대(對)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중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장비를 엄격히 통제하라는 미국의 압박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한미 양국간 관련 협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면서 한국 정부가 미국의 수출통제에 어느 정도 수준으로 보조를 맞출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 한미,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 관련 협의 개시
16일(현지시간) 뉴스1의 취재를 종합하면 한미 양국은 최근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와 관련한 협의를 시작했다.
지난 2월에도 산업통상자원부와 미 상무부간 관련 협의를 진행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공동위원회 개최 등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도 미측 카운터파트들과 관련 협의를 진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뉴스1에 "한미간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와 관련한) 협의를 시작한 것은 맞다"고 확인했다.
다만, 대중 수출통제 참여 문제가 한국 기업들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은 만큼 정부로선 극도로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전날(15일)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측과 수출통제 협의 여부 자체에 대해 "언급할 사항이 현재로선 없다", "방향성 등을 확인해 드리기 어렵다" 등 일체의 언급을 자제했다.
또 다른 소식통도 "미국이 계속 얘기하니 우리가 뭐라도 얘기를 해줘야 하는 상황이지, 수출통제에 참여하려고 검토한다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간 얘기"라고 말했다.
◇ 美, 중국 '韓 통해 반도체 수출통제 우회' 의심
한미가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와 관련한 협의를 개시한 것은 미국 정부의 압박 때문이라는 게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미국은 지난 2022년 10월 미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중국에 첨단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를 수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를 발표한 데 이어 반도체장비 기술 수준이 높은 네덜란드와 일본을 압박해 대중 수출통제 체제에 합류하도록 했다.
다만 한국은 반도체 장비 기술 수준이 높지 않은 데다 시장 점유율도 미미해 당초 수출통제 체제에선 빠져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첨단 반도체 분야에 대한 전방위 제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기술 진화 속도를 제대로 막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특히 이른바 '화웨이 쇼크'에서 드러났듯 중국이 미국의 제재를 뚫고 7㎚(나노미터·10억분의 1m) 반도체 양산에 성공했고, 이는 미국이 한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미국의 장비와 기술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우회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미국 최대 반도체 장비회사인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가 수출규제를 어기고 한국 자회사를 통해 중국 반도체 기업에 SMIC에 제품을 판매했다는 혐의로 미 법무부의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을 방문했던 고위당국자는 '미측에서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와 관련해 한국이 우회로가 되고 있다는 우려가 실제로 있었느냐'는 질문에 이번 협의에선 없었지만 "바세나르 체제 등 다자 회의가 국제적으로 열리면 미국이 공개적으로 늘 하는 얘기"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도 지난 1월 미국 기업들이 중국에 판매할 수 없는 장비를 외국 경쟁사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판매하고 있다며 한국과 대만 등 동맹도 미국과 같은 품목을 같은 방식으로 수출을 통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에 제출한 바 있다.
여기에 현재 수출통제 체제에 참여하고 있는 네덜란드와 일본도 바세나르 체제 등에서 한국이 수출통제 체제에 빠져 있는 점을 문제 삼으며 한국측에 대놓고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소식통은 "네덜란드와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한국 반도체 관련 기업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이를 의식한 듯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의 수출통제 이후 중고 장비를 판매하지 않고 창고에 보관해 오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 韓, 대중 수출통제 참여 수순?…韓 반도체 기업들은 강한 우려
한국 정부가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정부가 미국과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와 관련한 협의를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 수출통제에 어떤 식으로든 발을 들이는 수순이 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정부 내에서도 한미 관계 등을 들어 미국 측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다만 수출통제에 있어 미국과 보조를 맞추더라도 어떤 방식과 어느 정도 수준이 될지 여부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현재 미국은 △핀펫(FinFET) 기술 등을 사용한 로직 칩(16nm 내지 14nm 이하) △18n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장비·기술을 중국 기업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미국측은 한국도 가급적 미국과 같은 수준의 수출통제에 참여하길 바라고 있는 눈치지만, 아직까진 한국 정부에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제시하진 않았다고 한다.
한 소식통은 "미국 정부가 아직 한국이 어느 정도까지 수출통제에 참여하길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있진 않다"면서 "그런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야 우리가 어떻게 할지 여부를 결정할 텐데, 그런 게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현재로선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고, 협의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은 한국이 미국 주도의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에 참여하는 것에 강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정부와 관련 반도체 기업들의 내부 회의에서도 기업들은 정부측에 이같은 우려를 전달했다고 한다.
해당 회의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정부는 한미 관계를 생각해서 미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려는 분위기인 것 같은데,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반도체 기업들은 한국이 수출통제에 참여할 경우 중국이 강하게 반발해 한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제재 조치를 내릴 것을 우려하면서속앓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들에선 한국이 수출통제에 참여할 경우 과거 중국이 한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 반발해 '한한령'을 내렸던 것과 맞먹을 정도의 경제적 파장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하고 있다.
메모리 등 한국 기업들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비중이 상당한 상황에서, 수출통제 참여를 계기로 중국이 어떤 식으로든 한국 기업들의 중국 시장 접근을 제한할 경우 관련 기업들의 실적에 직격탄이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는 판단에서다.
한국의 반도체 장비 업체들도 중국 수출에 빗장이 걸릴 경우 장비 산업 전반에 성장판이 닫힐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정부 고위당국자는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에 한국 정부가 참여할 경우 한국 기업의 중국 내 반도체 사업이 영향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 "별개의 사안으로 판단된다"고 선을 그었다.
이로 인해 일각에선 한국이 미국 주도의 수출통제 체제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채, 미국과 협의를 거쳐 미국의 수출통제 기준에 준하거나 일정 수준을 충족하는 방식으로 독자적인 통제를 하는 것도 방안으로 거론된다. 미국의 요구를 받아주면서도 중국의 반발을 일정 부분 상쇄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다.
결국 '딜레마'에 빠진 한국 정부가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와 관련해 한미 관계와 한중 관계, 국내 반도체 산업 성장 등을 놓고 어떤 균형점을 잡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gayunlov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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