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까지 건드린 북한, 과거 남북 정상의 합의는 유효할까

[남북관계 긴급진단 ③] 김정은, '한민족 특수관계' 종결 선언 파장 지속
'특수관계' 속 도출한 각종 합의 '무효화' 예상…北 공식화 발표 여부에 주목

(평양 노동신문=뉴스1) = 북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rodongphoto@news1.kr

(서울=뉴스1) 허고운 기자 = 북한이 남북관계의 적대적 '대전환'을 결정하며 '투 코리아'로 가기 위한 헌법 개정 조치에 나섰다고 밝혔다. 특수한 민족관계를 끝내겠다는 선언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과거 남북 정상 간 합의도 사실상 무효화된 게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는 지난 15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남한을 '제1의 적대국·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하고, 헌법에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등의 표현을 삭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말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민족이라는 특수관계가 아닌 '전쟁 중인 두 개의 국가'라고 선언하고 통일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더 구체화된 조치들을 헌법에 명문화하겠다는 것이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상황에 따라 법을 개정하는 것은 다른 국가들보다 용이할 수 있지만, 국가의 가치가 반영된 헌법을 개정한다는 것은 함부로 손댈 수 없는 '항구적' 조치를 적용하겠다는 취지로도 읽힌다. 특히 이번 헌법 개정은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선대의 유산을 지우는 작업인 만큼 상당한 공을 들여 명분을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공언한 대로 남북이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된다면 특수성에 기반을 두고 도출한 남북 정상의 과거 합의가 모두 무효화될 가능성이 있다. 남북은 1972년 7·4공동성명을 통해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평화 통일 3대 원칙을 설정한 이후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 공동선언, 2007년 10·4 공동선언 등에 합의했다.

김 총비서가 헌법에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 원칙의 삭제를 지시한 건 7·4 남북공동성명을 더이상 존중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남북기본합의서 역시 민족화해, 불가침, 교류협력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어 '투 코리아'를 추구하는 북한으로선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각각 남측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발표한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은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추구한다는 전제 아래 작성됐기에 북한이 이미 백지화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김 총비서가 직접 참여한 2018년 판문점 선언과 같은 해 9월 평양공동선언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 2018.9.19/뉴스1 ⓒ News1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북한은 아직까지 헌법 개정을 완료하지 않았고, 그 구체적인 내용 역시 알려지지 않아 북한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또한 모든 남북 간 합의가 무효화된다고 해도 '통일'을 제외한 '평화' 부분은 어느 정도 흔적이 남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선제 공격'은 없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고, 당장 접경지 등에서 남북의 돌발 상황 발생 시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분단 상대방을 특수관계에서 다른 국가로 간주하고 통일을 포기하는 모습은 과거 동독이 걸었던 길과 유사하다. 동독은 헌법에서 '독일은 불가분의 민주주의공화국'이라고 규정하며 '독일민주주의공화국과 그 시민은 독일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이 이룩되도록 노력한다'라는 조항을 만들었으나, 1974년 통일을 헌법적으로 포기했다.

동독은 주민들이 서독의 헌정질서를 자발적으로 수용했고, 동·서독의 협상 끝에 통일이 성사됐으나 북한은 이 흐름을 따라갈 가능성이 높진 않다. 북한은 명목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임을 내세우고 있으나 사실상 김씨 일가 왕조 체제인 만큼, 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도 자신들 위주의 '흡수통일' 외 다른 방안을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은 "북한은 결국 기존 남북관계의 모든 합의를 무효화 또는 파기하겠다는 것"이라며 "김 총비서의 목적은 남한과 각자 도생의 사회주의 민족국가 건설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역대 남북 합의가 유효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온 정부는 북한의 움직임을 더 주시하며 대응책을 마련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현시점에서 정부가 북한에 변화에 발맞춰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로 전환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통일부는 지난 16일 북한의 각종 대남 조치 발표 이후 "북한의 움직임은 궁극적으로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노선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라는 입장을 밝혀 현 정세가 당장 '어떤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 아님을 부각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도 "남북 간에 많은 합의가 있었으나 북한은 핵심 합의를 제대로 준수한 적이 없었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될 여지가 큰 '자주' 정도만 유지해 왔다"라며 "이번 노선 변경은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자신들이 쥐겠다는 의도가 있다"라고 말했다. 북한의 '남북관계 대전환'은 북한 만의 주장일 뿐이라는 취지다.

박 교수는 또 "북한이 실질적으로 한국과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것으론 보이지 않는다"라며 "오히려 한반도의 긴장을 조성하고 우리 국민의 우려를 증폭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고, 그게 지금 상당히 성공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hgo@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