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와 친하되 中과도 척지지 않는 '스마트 외교' 필요 [한중일 글로벌 삼국지]
미중 신냉전·우크라戰·기후변화 등으로 외부 환경 급변
활발한 교류·교역 중요… 불필요한 긴장·갈등은 피해야
(서울=뉴스1) 백범흠 연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 우리나라는 2022년 현재 실효 면적 약 10만440㎢, 인구 약 5140만명, 국내총생산(GDP) 약 1조6700억달러에 유라시아 대륙 동단(東端) 한반도에 위치한 분단국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2021년 3만5000달러에서 2022년 3만2000달러로 8%나 감소했다. GDP는 세계 제10위에서 13위로 추락했다. 무역수지도 사실상 15개월째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주지(周知)하다시피 한국 북쪽엔 북한, 서쪽엔 중국, 동쪽엔 일본, 동북쪽에는 러시아가 자리하고 있다. 미국 본토는 태평양 건너편에 있지만, 미국의 해외 영토인 괌과 사이판은 우리나라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주둔군(駐屯軍) 형태로 우리 영토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점을 봤을 때, 미국은 물리적으로도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할 수 있다.
2022년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58.35%로 30.41%의 이웃 중국이나 24.51%의 일본보다 월등히 높다. 여기다 한국은 국가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와 식량 모두 자급이 불가능하다. '제4차 산업'에 필수적인 리튬과 코발트 등 천연자원도 없다.
이렇게 극도로 불리한 여건을 가진 한국이 1인당 GDP 60~70달러대 최빈국에서 3만달러대 선진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건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미·소 냉전 시절 '전선국가'(戰線國家)였던 관계로 '세계제국'(World Empire) 미국의 관심과 지원을 받은 데다, 1990년대 이후엔 급부상한 중국의 경제성장 물결에 올라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경제기술협력을 받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나라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와 교류하고, 활발히 교역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미국, 중국, 일본, 베트남, 유럽연합(EU) 등과의 관계가 악화되거나 멀어지면 지금 같은 번영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중 간 신냉전과 우크라이나 전쟁, 기후변화 등으로 외부 환경이 급속히 변하고 있다.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적시 대응하지 못하면 너무 빨리 동면(冬眠)에서 깨어난 개구리처럼 얼어죽고 만다. 또 너무 순응만 하면 점차 온도가 올라가는 비커 속 개구리 같이 결국엔 통째로 익어버리는 비극을 맞을 수도 있다. 시간적·공간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은 단층선상(斷層線上)의 국가는 매우 '스마트'한 외교를 해야 한다.
한 나라의 외교는 폭풍이 들이치고 암초가 깔린, 캄캄한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초대형 여객선의 조타실과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 선장이 너무 급하게 변침(變針)하면 배가 전복(顚覆)될 수 있다. 너무 천천히 가면 연착하고, 너무 급히 가도 배가 뒤집힐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에서 가장 지혜가 많고 유능한,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있는 사람을 선장으로 뽑고, 그 선장이 항해사·통신사 등의 도움을 받아 배를 잘 조타(操舵)해 가야 한다.
선장은 조타할 때 자기 고집이나 특정 이념을 개입시켜선 안 된다. 오직 배에 탄 승객들을 안전하게 제때 정해진 항구에 모셔다 줄 생각만 해야 한다.
한국이란 배의 몇몇 역대 선장은 조타술(操舵術)도 부족하고 항로(航路)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고집과 신념에 의존해 조타했다. 이에 따라 선장 임기인 5년마다 항해정책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혔다. 항해사나 기관사, 통신사 중 상당수도 스스로 학습하고 경험한 자기만의 세계관에 빠져들어 종종 선장에게 잘못된 정보와 방향을 제안하곤 했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병서에 나오는 대로만 병력을 운용한다'는 '지상담병'(紙上談兵)의 주인공이자 자기 나라 40만 병력을 몰살(沒殺)로 몰아넣은 장평대전(長平大戰)의 패장 조괄(趙括)같은 이도 종종 나타났다.
패권국가 미국이 알려주는 항로가 아니라 스스로 항로를 찾아야만 했던 1990년대 초 이후 취임한 선장을 도왔던 항해사나 기관사, 통신사 중 조괄 같은 사람이 다수 있었다. 이로 인해 때론 한국이란 대형 여객선이 한꺼번에 수십만~수백만명의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좌초(坐礁)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2023년 8월 현재도 우리 모두 암초가 깔린 캄캄한 바다를 항해하는 여객선에 몸을 싣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선장과 항해사 등이 항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딴 짓을 하거나 졸지 않도록 감시·감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승객들은 항로 왼쪽 끝으로, 다른 승객들은 항로 오른쪽 끝으로 배를 조타해야만 승객이 편하고, 빨리 항해할 수도 있다고 소리소리 지른다. 특히 북한이나 일본, 중국과 관련된 항로에서 그렇다.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승객들에겐 빨간 물이나 검은 물이 들었다고 욕하고, 심지어 그런 사람을 바다에 빠뜨려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선장이 어느 한쪽 말만 듣고 그대로 조타하면 여객선이 항로에서 벗어나 좌초된다. 편견에 사로잡힌 항해사의 조언과 주장에만 귀기울여도 마찬가지다.
선장은 정확한 항로 판단이 되지 않을 때, 화내고 소리 지르기보다 균형감을 갖고 항해사 등의 조언을 받아들여 제대로 된 항로를 찾아야 한다. 승객들은 종종 다른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선장 스스로가 풍부한 항해 경험과 지식으로 무장, 항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승객을 안심시키며 안전하게 조타해가야 한다.
세계제국 미국과 친하지만 경제대국 중국과도 척지지 않는 스마트한 외교를 통해 1인당 GDP 8만2000달러의 부(富)를 일궈놓은 싱가포르, 지중해 아드리아만 깊숙이 자리해 '하나님은 나중, 공화국이 먼저'란 현실주의를 기초로 1000년 영화를 누렸던 베네치아를 참고해야 한다.
우린 동맹국 미국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 러시아, 심지어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북한과도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선장이나 항해사의 고집과 이념, 세계관에 따라 그들과의 불필요한 긴장이나 갈등을 되풀이하면 항해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건 물론, 대외 교역 등 기업 활동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뛰어난 선장과 현명한 항해사가 함께 한국이란 대형 여객선을 잘 조타해 암초 가득한 바다를 지나 1인당 GDP 10만달러의 불빛이 반짝이는 항구에 도착시켜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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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백범흠 교수는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연방행정원 행정학석사, 프랑크푸르트대 정치학과 석박사 통합과정을 이수한 뒤 2006년 경제외교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외무고시 제27회 합격 뒤 주중국대사관 총영사, 주다롄영사사무소장, 주프랑크푸르트 총영사,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등을 역임했으며, 중국청년정치대와 연세대에서 객원교수를 역임 또는 재임 중이다. 2023년 7월 현재 한중일 3국협력사무국(TCS) 사무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백 교수는 '미중 신냉전과 한국 Ⅰ·Ⅱ' '중국' '한중일 4000년' 등 7권의 저서를 펴낸 동아시아 문제 전문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