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만 몰두하는 여야…뒷전 밀려난 '반도체법'·'전력망확충법'
[저성장 위기 속 정치 실종]①반도체 주52시간 예외 놓고 접점 못찾아
산업계 법안 통과 절실히 요구하지만…상법개정안까지 밀어붙여
- 송상현 기자
(서울=뉴스1) 송상현 기자 = 내년 경제성장률이 1%대로 예상되는 등 저성장 위기가 심화하고 있지만 여야 정치권은 경제계가 요구하는 주요 법안들을 처리하지 않고 있다. 정치가 경제를 뒷받침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는 목소리가 높다.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반도체특별법과 전력망확충특별법, 고준위방폐장법 등은 산업계가 법안 통과를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지만 여야는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야당은 경영 활동을 제약하는 상법 개정안까지 밀어붙이며 산업계의 의욕을 꺾고 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22대 국회 들어 나란히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반도체특별법)'을 발의하면서 반도체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는 데에는 뜻을 모았다. 다만 '주 52시간 예외(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조항을 두고 시각차가 커 지난달 26일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중기위) 소위 안건에도 오르지 못한 채 본회의 처리가 무산됐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은 일정 연봉 이상의 고위직 근로자에게 근로 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고 성과 중심으로 보상하는 방식으로 미국에서 시작돼 독일, 영국, 일본 등에서도 안착됐다.
여당은 반도체특별법안에 이 조항을 넣어 노사 합의를 전제로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을 주 52시간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올해 3분기 기대 이하의 실적을 받아들며 우리나라 핵심 산업인 반도체 위기론이 고개를 들자 R&D 인력만이라도 주 52시간에 예외를 둬 미래경쟁력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반면 민주당은 주52시간 근로제 예외가 허용되면 다른 산업계에서도 불필요하게 근로시간유연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와 장시간 노동에 따른 건강권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우려하며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전력망 구축 사업의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는 전력망특별법과 원자력발전 과정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고준위 방사성폐기물)를 저장·관리하는 시설을 만드는 고준위 방폐장법 역시 여야가 모두 민생법안으로 지정했지만 정쟁에 막혀 본회의 통과가 요원하다.
국가전력망특별법은 지난달 26일 산자중기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고준위 방폐장법은 같은 날 산자중기위 소위에서 법안을 심사했으나 민주당이 해상풍력발전보급촉진 특별법과 연계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전력망 특별법은 전력망 건설 과정에서 예산·기금 등을 건설비와 지역 주민 보상 등에 활용할 수 있게 하고, 정부 차원의 개입으로 각종 인허가 절차에 속도를 더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대규모 전력을 요구하는 AI(인공지능), 반도체 산업 등을 뒷받침하기 위해선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중요한데 송전망 구축이 평균 5~6년 이상 지연되는 상황이어서 특별법의 필요성이 큰 상황이다.
고준위 방폐장법의 경우 현재 원전 부지 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임시 저장시설 용량이 이르면 2030년부터 순차적으로 포화해 원전을 멈춰야 하는 상황까지 맞을 수 있다는 데서 원전업계의 요구가 높다.
여야는 이미 21대 국회에서도 막바지에 두 법안 처리에 공감대를 이뤘지만 해병대원 특검법을 둘러싼 극한의 대치 상황 속에 뒤로 밀리며 자동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 역시 여야가 김건희 여사 특검법, 해병대원 국정조사 등을 놓고 대립하고 있어 법안 통과를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지난달 28일 본회의에서 민주당이 다수결로 통과시킨 농업4법 등 6개 법안에 대해 국민의힘은 대통령의 재의요구를 건의하는 등 쟁점 법안을 둔 여야의 기 싸움은 가라앉을 줄을 모른다.
더군다나 국민의힘은 당원 게시판 논란 등 내부 잡음이 끊이질 않고,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 현실화 속에서 '김건희 특검법'이나 '검사 탄핵' 등으로 이재명 방탄에 집중하는 형국이어서 경제 법안 처리는 뒷전으로 밀리는 형국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각각 당내에 민생경제특별위원회와 미래경제성장전략위원회를 설치해 놓고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경제 법안이 우선순위에서 멀어지다 보니 여야가 합심해 성과를 내는 국회 특별위원회는 22대 들어 하나도 출범하지 못했다.
경제계의 우려를 더 하는 것은 민주당이 당론으로 발의한 상법 개정안이다. 상법 개정안에는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고, '주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주 보호 의무 조항이 담겼다. 이 외에도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규모를 확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게 민주당의 논리다.
국민의힘은 기업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해칠 수 있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가 부과되면 회사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이 남발될 것이며 집중투표제가 도입되거나 감사위원 분리 선출 규모가 확대되면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권 장악 시도를 막기 어렵다는 것이다.
경제계 역시 야당의 상법 개정안에 반대한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FKI)와 삼성, 현대차 등 국내 주요 기업 16곳 사장단은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소송 남발과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으로 이사회의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지고, 신성장동력 발굴에 애로를 겪게 할 것"이라며 논의 중단을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내기도 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여야 간 대치 구도가 심각한 상황이다 보니 쟁점이 크지 않은 법안을 놓고도 쉽게 접점을 찾지 못하고 일단 뒤로 미루는 모습"이라며 "경제 위기가 코 앞에 온 상황에서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으려는 경제계가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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