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시간에 온 '국회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기자의 눈]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린 금융위원회·한국산업은행·중소기업은행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증인 선서를 하고 있다. 2024.10.10/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린 금융위원회·한국산업은행·중소기업은행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증인 선서를 하고 있다. 2024.10.10/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서울=뉴스1) 김근욱 기자 = 지난 10일 정무위원회 국정감사를 앞둔 회의실은 태풍이 몰아치기 전처럼 고요했다. 피감 대상인 금융위원회 관계자들은 팔뚝만한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날카로운 쇳소리처럼 들릴 정도였다. 국감장 뒤편에 놓인 60여개의 의자엔 금융권 관계자들이 긴장 서린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러나 국감 시작 시간인 오전 10시까지 회의실에 도착한 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의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다시 서류를 펼쳤다. 그것도 잠시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서류를 덮었다 펼치기를 반복했다. 혹 시험을 앞둔 수험생 모습 같기도 했다.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끝내 눈을 감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의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10시 12분이 넘어서였다.

국감장에 입장한 의원들은 각양각색 '런웨이'를 펼쳤다. 한 의원은 왼쪽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검은 양복을 펄럭이며 어기적어기적 걸었다. 몇몇 의원들은 시시콜콜한 안부를 주고받으며 들어섰는데 그들의 웃음소리가 적막한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우리가 상상하는 '지각생'처럼 허리를 숙이고 총총걸음으로 입장하는 의원은 없었다. 한 의원은 금융위원장과 기업은행장, 산업은행장 앞으로 걸어가 당당하게 악수를 청했는데 오히려 허리를 숙이는 건 '그들'이었다.

기자 일을 시작한 후 수많은 정부 브리핑, 기업 간담회, 법원 재판에 참석했지만 회의가 예정된 시간을 넘어서는 건 드물다. 그런데 '국회의 시계'는 달라서일까. 이날 지각을 사과하는 의원이나, 지각에 문제를 제기하는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역대 정무위 국정감사 회의록을 살펴봤다. 지난해 금융위 국정감사는 10시 16분, 재작년엔 10시 5분에 시작됐다. 역시나 국감이 제시간에 시작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국회 관계자에 따르면 국감 시작 전 여야 의원이 모여 사전 협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협의를 이유로 늦거나 심지어는 파행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국감을 기다리는 수많은 부처 관계자들과 증인·참고인, 그리고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회의 시간 전에 협의를 끝내겠다는 의지는 없어 보인다. 22대 국회가 여야 대립 속 임기 시작 96일 만에 개원식을 열면서 '역대 최장 지각 개원' 불명예를 쓴 것도 이 사소한 습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국감 현장에는 어김없는 태풍이 몰아쳤다. 의원들은 피감 대상 기관을 향해 윽박질렀고, 기관장들은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 법은 국회에 행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산적한 현안과 필요한 정책들을 점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당당하게 지각해도 되는 권한은 주지 않았다.

ukgeu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