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읽기] 핵과 인간, 핵군비통제의 미래를 위한 시민사회
2024년 1월 미국 핵과학자회(BAS, Bullentin of the Atomic Scientist)는 지구 종말까지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지구 종말 시계'를 발표하며 작년과 같은 (지구 종말을 의미하는 자정까지) '90초'라고 밝혔다. 2023년 BAS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의 핵 사용 위협으로 핵무기 금기가 침식된 국제환경에 대한 우려로 '90초'로 지구종말시계를 당긴 바 있다. 2024년에는 러-우 전쟁과 함께 핵국가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에 따른 분쟁 확대, 기후변화의 가속화된 위협, AI 발전 속도에 비해 더딘 규범 확립 등이 지구 종말 시계의 주요 요인으로 꼽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핵 사용 위협과 함께 2023년 2월 미러 간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 탈퇴, 12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 철회에 이어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에서 탈퇴했다. 종전의 핵·미사일군축 협정의 파기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미러, 미중 간 MD 경쟁 및 핵국가들의 억제전략 변화의 결과로, 핵국가 간 군비경쟁 심화 속에 최근에는 미중러 3개 핵강국의 안보딜레마, '핵트릴레마'가 우려되는 형국이다. 이러한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역내 전략자산 증가에 따른 북한의 비대칭 전력 증강, 이에 자극된 한국의 군사력 강화 등 연쇄가 일어나는 한반도 위기고조 상황은 오인, 오판에 따른 핵전쟁 가능성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한반도 핵·재래식 군비경쟁의 파고는 국제안보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과거 반핵평화운동의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글로벌 시민사회의 개입, 참여의 파도가 거세질 수밖에 없는 압력을 낳고 있다. 2차대전 이후 세계는 1945년 8월 6일, 8월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이 투하한 원폭 이후, 격렬한 반핵운동의 시민적 연대를 구축했다. 반핵반전운동의 슬로건은 서구 지식인 사회는 물론 제국주의 독립투쟁을 진행 중이거나 희망하는 제3세계 국가 사회에 이르기까지 공유되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전세계적으로 3차대전의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양극화된 국제질서에서 핵전쟁의 공포는 자연스럽게 반전반핵 기치를 든 평화운동을 촉발했다. 1962년 영국의 CND(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집회에서는 15만 명이 모여 반전반핵평화에 대한 대중들의 강력한 염원을 드러냈다. 1970년대 말 나토의 미사일 배치와 소련의 S-22 미사일 배치가 대치하며 유럽 내 핵 위협에 따른 긴장이 고조되면서 1982-1983년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반핵평화운동은 당대 큰 영향을 발휘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평화에 대한 선호 자체는 분명하다 하더라도 평화라는 궁극적 목적에 이르는 과정, 단기 중기 장기 단위 목적, 수단 및 방법론에 대한 인지나 합의의 기반은 취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의에 동의하더라도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의 관점에서는 최소주의적 합의보다도 이질성과 차이, 반목이 더 부각되는 상황을 우려할 수 있다. 최근 핵무장 관련 한국의 설문조사 결과를 참조하면 비핵화, 평화에 대한 한국 국민의 인식, 방법에 대한 견해 역시 다양한 갈래로 갈라지며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확인된다. 핵군축론, 군비통제론의 시각에서 최근 한국 핵무장 여론이나 일본에서 나타나는 안보 강화 여론 등은 현재 정세에서 반전반핵평화를 상상하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인가도 확인해 준다.
중장기 관점의 평화구축과 군비통제 논의가 실종된 상태나 다름없어 보이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핵과 인간의 관점에서, 즉 글로벌 핵정치(nuclear politics)에서 대개 간과되어 왔고 '침묵'을 강요받아온 인간에 대한 핵의 영향을 직접 증언하는 원폭피해자의 존재는 시민사회, 그리고 국회가 핵군비경쟁과 안보 딜레마의 위협에 어떤 목소리, 행동이 필요한가 숙고하게 만든다.
2023년 11월 마지막 주(11.27-12.1) 뉴욕 UN에서는 핵무기금지조약(TPNW) 당사국 제2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유엔 핵무기금지조약은 당사국이 핵무기나 핵폭발장치를 개발, 실험, 생산, 제조, 획득, 보유, 비축, 이전, 사용 또는 위협하거나 영토에 핵무기나 핵폭발장치의 주둔, 설치 혹은 배치를 허용하는 것, 핵무기 관련 활동에 참여하도록 지원하거나 촉진하거나 유도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금지한다. 대표적 국제 비확산체제인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기존 핵국가(P5)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핵무기금지조약은 핵무기를 전면 금지한다. 2021년 발효된 핵무기금지조약은 2024년 2월 현재 전 세계 93개국이 서명하고 그중 69개국이 비준한 상태다.
특기할 사실은 핵무기금지조약은 그 형성 과정에서부터 핵무기 생산 및 배치, 사용 등과 관련해 피해를 받을 수 있는 인간의 존재에 관심을 두고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구호를 조약 규정에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핵무기금지조약 창설에 헌신한 공으로 201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반핵평화시민단체들의 국제연대체인 ICAN(International Campaign to Abolish Nuclear Weapons)은 핵무기금지조약을 호소하는 옹호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핵무기 참사를 직접 몸으로 경험한 원폭피해자들의 '증언'을 중요한 계기로 꾸준히 활용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이 국제회의에서 자신들의 피폭 생애와 함께 인도적 견지에서 핵무기 금지를 호소할 수 있도록 조직한 ICAN의 활동으로 2017년 핵무기금지조약이 체결되었고 현재는 조약에 서명하지 않은 핵국가, 혹은 핵우산 국가들을 포함해 서명국을 확대해 나가는 시민사회 연대, 의회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2차 TPNW 체결당사국 회의에서도 원폭피해자, 생존자들의 증언이 이뤄졌고, 이번 회의에는 한국인 원폭피해자 이기열씨가 증언을 진행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증언은 이주와 식민, 강제동원·징병과 피폭, 귀환 이후 오랜 기간 한국 정부의 방치와 무관심, 미국, 일본 정부의 부정과 배제 정책으로 중층적 수난을 겪어온 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존재는 여전히 가시화되지 못한, '인정투쟁'의 장에 머물러 있다. 인류 역사상 실제 핵무기 사용에 피폭된 생존자로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지속해 온 비핵평화에 대한 요구가 한국 사회 내부에서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은, 시민사회 그리고 국회가 중장기 한반도 평화구축의 조건으로서 핵군비통제 의제를 접근하는 방식으로서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지구 종말의 자정을 맞지 않기 위한 글로벌 시민사회, 국가 간 합의 형성은 과거 핵무기 참화를 겪은 원폭피해자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김태경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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