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읽기] 정부위윈회서 노동조합 배제가 우리 삶과 밀접한 이유
요즘 정부위원회에서 노동자 대표를 배제하는 결정이 이어지고 있다. 87년 이후 민주적 관료 통제는 한국 정치와 행정의 중요 과제였다. 정부위원회에 관심이 높아지고 시민참여의 수단으로 주목되며 숫자도 꾸준히 늘었다. 2022년 6월 기준 중앙정부 산하 위원회는 총 636개다. 특히 민주화 이후 신설된 위원회들은 수혜 대상과 집단의 확대를 꾀하는 정책, 집단 간 갈등을 유발하고 첨예한 이해관계 조정이 필요한 '재분배' 이슈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이에 노동단체가 참여하는 위원회 숫자가 늘었고 전체 위원회 중 약 10% 내외 수준이다. 그런데 지난 1년간 벌써 문제가 생긴 위원회가 11개다.
시작은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였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2기,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노동조합 대표들이 제외되기 시작했다. 다음은 보건복지부로 올해 5월부터 10월까지 양대 노총이 모두 배제된 위원회는 건강보험공단 재정운영위원회, 보건의료정책 심의위원회, 장기요양위원회, 국민연금 심의위원회로 총 4곳이다. 국민연금기금 운영위원회에서 민주노총 근로자 대표위원이 해촉당했다. 이외에도 민주노총만 참여해온 사회복지처우개선위원회, 유보통합추진위원회와 한국노총만 참여했던 세제발전심의위원회, 경제교육관리위원회 4곳에서 모두 배제됬다. 최근에는 노동부가 운영하는 위원회 전반으로 양대 노총 배제가 진행될 것이란 추측이 이어지고 있다. 산업재해보상보험 및 예방심의위원회를 시작으로 최저임금위원회, 노동위원회 등등 양대 노총 총연맹의 노동자위원 추천권 축소를 계획한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왜 정부는 이러한 결정을 할까. 가장 큰 이유는 위원회가 시민사회의 집단이나 세력 간 합의 도출이나 내용의 집합보다 정부정책의 정당화와 정책 집행의 효율적 수단으로 활용되어서다. 회의체에 참여한 이해당사자들이 단체가 의견은 말할 수 있지만 단지 '참고'일 뿐이라며 위원회가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더욱이 한국의 자율적 결사체 비율이 낮다 보니 회의체에서 당사자 이익을 대표하고 표출하며 대등하게 논의를 이끌 수 있는 민간위원의 안정적 구성이 어렵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4%에 불과하다고 대표성을 문제 삼는 이들이 있는데 다른 집단과 비교하면 형편이 나은 편이다. 사용자단체 조직률을 따져보면 중소기업중앙회가 10.8%이고, 한국경총은 0.07%, 대한상의는 0.3%를 포괄하고 있다. 노사단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행정연구원 '사회통합실태조사'의 한국 시민의 단체 참여 실태를 살펴보면, 직업이나 계층, 지역 이익을 표출하고 결사하는 단체에 참여해 활동하는 시민 비율이 극히 낮다. 직능단체 참여자는 5.3%, 지역사회 모임은 8.5%, 사회적 경제조직은 3.6%, 시민단체 참여는 3.4%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눈에 띄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사회를 그간 지배해온 기업권력이나 관료제와 불협화음을 내는 것도 꺼려하지 않는다. 정부위원회의 운영 관행이나 위원장의 회의 진행에 따르지 않거나 의제 선정부터 회의 내용을 문제 삼는 경우도 많다. 노동계 사람이 특별히 모나서가 아니다. 노조 선출직의 경우 위원회에서 자칫 잘못된 결정을 하면 재임이 어렵거나 탄핵의 위험성도 있다. 태생적으로 막대한 정치적 책임이 따른다. 반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거나 체계 없는 단체의 구성원일수록 '다양한' 이해를 대표한다는 책임성은 전적으로 개인의 인격이나 능력에 좌우된다. 이견이 있어도 굳이 불편하게 불협화음을 자처할 유인이 크지 않다. 정부 입맛대로 위원회를 이끌고 싶을수록 노동조합은 가장 빼버리고 싶은 존재이기 쉽다.
그런데 갈등과 충돌로 회의가 시끄럽고 결정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 두려워 이해관계자가 논의에서 빠지면 어떻게 될까?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없는 정도가 아니다. 시민의 삶을 위협하는 결정도 너무 쉽다.
사실 우리는 그 경험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밝혀진 바와 같이 국민연금 기금이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를 위해 동원되며 막대한 손실이 있었다. 당시 손실액은 참여연대 분석에 따르면 무려 5200~6750억 원에 달한다.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모두 유죄 판결을 받는 등 법원이 정책결정의 큰 문제를 인정했다. 당시 노동계를 비롯해 이해관계자들이 추천한 전문가들이 운영위에 있었고 이들이 처리할 안건이었다. 하지만 통과가 어려울 것이라 예상되자 아예 운영위 안건에 올리지 않고 공단 내부 투자전문위원회에서 결정해 처리해버렸다. 즉 이해관계자가 참여해도 정부 고위직이 위법행위를 공모하니 시민 전체의 노후 자금을 위협하는 위험한 결정을 막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번 정부는 법원조차 인정한 보건복지부의 지난 잘못을 부인하는 검사 출신 변호사를 상근전문위원으로 임명했다. 기금운용위에서 민주노총의 위원을 해촉시키는 등 양대 노총의 개입력을 계속 악화시키려 한다.
더욱이 현재 정부는 총연맹을 위원회에서 배제하는 명분으로 양대 노총 독점을 깨고 위원회 문호를 넓힌다는 논리를 내세우는데 이러한 정책과정은 가장 하층 노동자의 삶부터 파괴할 수 있다.
참여뿐 아니라 결정에도 비용이 든다. 누군가는 정보 처리와 해석을 통해 불확실성을 줄이는 역할을 해야 하고 그게 조직이다. 상당수 정부위원회는 매우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다룬다. 회의체에 오랫동안 수십 년 같은 의제를 다루며 지원‧참여하는 실무진이 있다. 혹은 그런 전문가를 알아보고 추천한다.
가령 최저임금위원회는 언론 보도에는 결정된 액수나 고용효과 정도가 보도된다. 그런데 실제 위원회에 참여하는 근로자위원이나 이들을 지원하는 실무진은 위원회를 둘러싼 각종 법적 쟁점과 실태, 관련 제도 및 법률의 국가별 차이, 결정 기준의 구체적 산출 근거와 활용지표의 국제기준, 심의에 활용하는 통계별 조사 방법과 문항별 쟁점 등등 상세하고 전문적인 내용은 물론 각 산별연맹(노조)을 비롯한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알고 있다. 당연히 노-사-정-공익 위원의 상대 조직과 개별 위원의 특징을 파악하고 고도의 정치과정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구체적인 지식과 정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조직이 취약한 위원이 근로자 대표로 참여하면 어떻게 온전히 노동의 이해가 반영될 수 있을까? 사측은 물론 정부위원과 공익위원의 논의를 따라가기조차 버거울 뿐이니 동등한 교섭이 될 리 없다.
정책이 노동결사체 기반을 상실할수록 사회는 더 불평등해진다. 최저임금 인상에 문제가 생기면 당장 피해를 입는 노동자는 최저임금 기준에서 소득이 결정되는 저소득노동자다. 연금 재정운영에 가입자 이해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문제가 생겨 혜택이 줄어들수록 노후가 곤란해지는 이는 소득이 낮거나 아예 노후 준비를 할 수 없는 취약계층이고 미조직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 주목할 측면은 중앙 정부 거버넌스 운영과 집행 방식은 우리 사회 전반의 정책과정의 하나의 규범이자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공공기관 내에도 민주적 정책 결과 집행을 위해 다양한 위원회가 존재한다. 크고 작은 조직마다 상설‧비상설로 기관의 운영, 인사나 징계, 사업이나 연구 등의 심사나 평가, 고충 처리나 분쟁 조정, 정보 공개 등등 기관 위상과 역할에 따라 단순한 자문위부터 합의 및 심의 의결을 하는 위원회를 두고 있다. 조직 규모와 성격과 문화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아직 기관 내 위원회 역시 구성원 간 소통과 의견 조정보다 정해진 방향으로 결정과 집행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러다 보니 공공기관의 사업과 인력 운영이 리더십의 교체 주기에 따라 지나치게 급변하기도 한다. 기술개발 등 혁신과 창조적 파괴가 필요한 사기업에서 빠른 속도는 강점이지만, 공공분야는 일관성과 전문성이 중요한데 말이다. 각종 위원회가 앙상한 형식만 있어 안정적인 기관 운영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중앙 정부의 일방적 노동조합 제외 결정은 단순히 이해관계자 배제만 아닌 한국 사회 전반에 효율적이고 빠른 결정을 위해 이견이나 이해관계자의 의사는 억누르거나 소외될 수 있다는 나쁜 시그널을 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 한국도 선거 때 누군가를 뽑는 문제를 넘어서 민주주의 거버넌스가 무엇이며 그 과정에 대해 더 많이 숙고할 사회가 되었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구성원 간 최선을 만드는 느린 조정 과정에 미덕이 있음을 고려하길 희망한다.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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