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읽기] 미래시제의 평화구축과 피폭자의 핵전쟁의 기억

 김태경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김태경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분열된 사회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평화라는 희망을 실현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평화구축(peacebuilding)의 시제는 미래형이다. 이 미래형의 평화를 확립하는 작업은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재가 어떤 과거의 축적을 거쳐 여기에 다다랐는지 이해하고, 그 엉킨 갈등과 분쟁의 타래를 풀며 화해와 용서를 통해 지금까지의 적대를 다른 유형의 관계로 전환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과거시제의 역사적 탐색과 떨어질 수 없다. 현재에 이르는 ‘비평화’에 대한 탐색은 분쟁의 모든 당사자들이 갖는 과거의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단순한 폭력의 중단에 그치지 않는, 해묵은 불평등, 부정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보다 적극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모든 당사자들이 함께 공동의 미래에 대한 도덕적 상상력을 통해 뿌리 깊은 갈등으로부터 새로운 성격의 관계로의 변화, 전환을 만드는 과정이 평화구축이다.

미래시제 평화 구축의 관점에서 2023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2023년 한반도는 정전협정 체결 70주년, 그리고 일제 해방으로부터 78주년을 맞는다. 또는 누군가에게는 피폭 78주년이다.

해방 직전 일본에 거주했던 조선인 230만여명 중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있던 징용공, 징병군 및 가난을 피해 도일한 사람은 14만여 명 정도였다. 이들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미군이 투하한 원자폭탄에 피폭되었다. 70만명 전체 피폭자 중 10%에 달하는 7만명이 조선인이었다. 이중 사망자가 4만명, 생존자 3만명 중 귀국자가 2만3000명, 나머지 7000명이 일본에 남고 귀국자 중 약 2000명이 북으로 갔다고 추정된다. 2020년 12월 현재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등록된 원폭 피해자는 2093명이다.

그중 원폭 피해자 곽귀훈은 1944년 9월 징병되어 히로시마에 위치한 ‘서부 제2부대’(옛 제5사단 11연대)에 배치됐다. 1945년 8월 6일, 전날 새로 배치된 공병대에서 늦게까지 이어진 공습경보가 끝난 아침, 그는 점호를 끝내고 4열 종대 행군 중 상공의 B-29 비행기 두 대를 바라본 직후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세상을 경험했다(곽귀훈, <나는 한국인 피폭자다>, 민족문제연구소, 2013). 온 세상이 붉은 불덩어리로 돌변한 후 고막을 찢는 웅장한 굉음에 따른 천지의 진동, 그리고 사방이 온통 깜깜한 암흑세계로 변했다. (치명적인 방사능을 함유한) 검은 비가 내렸다. 낮과 밤을 이어 온시가지가 불바다로 변한 히로시마시는 2~3일이 지나 사막으로 변했고 일곱 줄기 오타강에는 시신이 가득 찼다.

곽귀훈의 공병대는 폭심지로부터 2㎞ 거리에 있었다. 그가 하루 전까지 있던 서부 제2부대는 폭심지에서 750m 거리에 있었다. (2011년 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일본 정부는 원전으로부터 반경 20㎞를 의무소개구역으로 지정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일본 승리의 핵심 주력부대의 하나였던 히로시마사단이 위치한, 우지나항에서 군인,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일본 최대의 군사도시 히로시마는 도쿄, 오사카와 같은 대공습은 피했으나 인류 역사상 첫 원폭투하라는 비극을 경험했다.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의 고통,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라는 일본의 국제사회에 대한 언명 뒤에는 당시 피폭된 두 도시에 전체 피폭자의 1할인 조선인과 함께, 중국인, 전쟁포로였던 네덜란드인 등 10여개 국의 국민이 있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곽귀훈, “나의 시점,” <아사히신문>, 2002.2.5.).

1998년 곽귀훈은 피폭자는 일본 국내에서만 원호를 받을 수 있었던, 피폭자원호법의 재외피폭자 적용을 요구하며 일본을 제소했고 2001년 6월 오사카지법에서 승소했다. 일본 정부 항소 후 2002년 12월 2심에서 승소했고, 고이즈미 정부의 상고 포기에 따라 재외피폭자들도 건강수첩을 받고 건강관리수당을 청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곽귀훈 이전에 ‘수첩재판’으로 유명한, 일본인과 똑같이 피폭자건강수첩 교부를 청구한 피폭자 손진두의 재판은 1978년 일본 최고재판소가 원폭의료법(1957년 3월 시행, 1995년부터 원폭의료법과 원폭특별조치법을 통합한 피폭자원호법 시행)의 ‘국가 보상적 성격’(원폭피폭의 특수한 전쟁피해에 관하여 전쟁수행의 주체였던 국가가 스스로의 책임으로 외국인이든 불법입국자든 구제를 도모한다는)을 인정하면서 최종 승리했다(곽귀훈, 위의 책, p.149). 그러나 일본 내에서의 피폭자 치료, 건강관리수당만 인정해 사실상 일본 밖의 조선인 피폭자, 미국, 브라질 등지 일본인 및 타국적 피폭자를 배제했던 것을, 곽귀훈의 재판 승소로 피폭자가 어디에 있든 그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다”라고 주장한 투쟁과 삶의 과정에서, 곽귀훈은 한국인 피폭자의 존재 자체에 무지한 숱한 일본인과 한국인을 마주했다. 그는 1959년 8월 한국일보에 ‘히로시마 회상기’를 연재하며 피폭 경험을 발언했고 한일협정 협상 과정에서 완전히 침묵된 피폭자 피해와 관련해 단신으로 외무부에 문제제기하기도 했다.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협정은 총 5억 달러의 경제협력 자금을 받는 조건으로 양국 간 모든 청구권이 청산된 것이라 선언했다. 원폭 피해자들은 한국에서는 피해를 입은 일본에 가서 호소하라, 일본에서는 한일협정 발효로 모두 해결이 되었으니 책임이 없다고 외면당했다. 1971년 원폭피해자협회(1967년 원폭피해자원호협회 창립) 재발족과 함께 곽귀훈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제 및 권리 확보를 위해 활동하면서 일본의 피폭자, 시민단체와 오랜 연대를 구축했다. 1990년대 들어 20만 일본군 위안부, 7만 원폭 피해자, 4만 사할린 잔류동포 등 일본정부가 외면한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고, 1992년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 징용공 김순길의 강제동원과 강제노동, 피폭 피해에 따른 사죄와 위자료 소송, 1995년 미쓰비시 히로미사 징용공 46명의 소송 등에 이어 곽귀훈이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 모임’ 이치바 준코 회장과 함께 재판 투쟁을 진행했다.

2000년대 곽귀훈은 일본 밖 미국, 중남미, 한국, 북한 등에 존재하는 재외피폭자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한편으로 핵 없는 세계를 위한 국제적 반핵평화 시민연대에 활발히 참여했다. 여전히 건강수첩을 교부받지 못한 국내 무원호 피폭자, 북한 내 피폭자의 권리를 옹호하며 핵참화를 경험한 피폭자로서 핵군축, 동북아시아 비핵화를 호소한 곽귀훈의 주장은, 군비경쟁과 함께 한반도의 국지적 도발 위험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지금, 더욱 설명하게 울린다.

3월 13-23일 ‘프리덤실드’ 한미연합연습을 앞두고 최근 한반도에 전개된 B-52H, B-1B 등 전략폭격기 중 B-52는 핵무기 탑재가 가능하다. 1945년 원자탄 ‘리틀보이’, ‘팻맨’을 싣고 태평양 티니안 섬에서 상륙한 핵폭격기 ‘에놀라게이’, ‘박스카’를 비롯해, 한국전쟁시 일본 요코타 기지,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에서 발진해 북한을 폭격한 B-29 ‘슈퍼포트리스’는 퇴역했으나, 더 현대화된 장거리 핵폭격기의 전개는 역내 긴장을 강화한다. 북한의 ICBM 발사에 대응하는 미국의 핵 자산 전개를 통한 확장억제 공약 대 연합훈련 기간 맞대응을 불사한다는 북한의 경고에 2023년 3월 한반도는 ‘춘래불사춘’의 상황이다.

신년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대통령의 ‘자체 핵무장 가능성’ 언급과 함께 국민들의 60~70%가 핵무장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들이 최근 조명됐으나, 들여다보면 우리 국민의 핵무장에 대한 인식은 17년 전, 10년 전에도 비슷한 수준을 보였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 공약을 신뢰하는 사람일수록 핵무장에 찬성하는, ‘상식적’ 통념을 벗어나는 경향도 관찰된다(박주화, “핵무장을 원하는 국민인식의 세 가지 특징”, 통일연구원, 2023.2.7).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존재, 원호, 목소리에 오랫동안 무심했던 한국 사회의 핵무장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란 어쩌면 우리 안에 실존한 핵전쟁의 기억조차 손쉽게 지워버린 결과일 수 있다.

예컨대 티니안섬에서 B-29 폭격기가 출발한 활주로를 놓았던 것은 미군이 점령하기 전까지 사이판과 인근 도서를 차지하고 비행장을 만든 일본군에 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들이었다. 섬에는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한 이 노무자들을 기린 위령비와 파괴된 시신 소각장이 존재한다. 강제징용된 사람들 대부분이 히로시마 군수공장에 투입되어 원폭 피해가 컸던 경남 합천군에서는 매년 8월 원폭피핵자 위령제 및 합천비핵·평화대회가 열린다. 피폭 71년이 지난 2016년 5월이 되어서야 제19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는 ‘한국인 원자폭탄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생전에 특별법 제정을 위해 헌신한 한국원폭2세환우회 김형률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원폭 피해자 정의에서 2~3세 후손은 빠져있다.

평균 80세를 넘어서는 현존 원폭 피해자들과 피폭후유증이 유전되는 원폭 2~3세들의 지속된 고통과 희망은 지속가능한 평화 구축을 위해 우리 사회가 누구의 기억을 공유해야 하는가 진지하게 묻는다. 연초 100세 가까운 나이까지 왕성하게 발언하고 활동했던 곽귀훈의 부고가 있었다. ‘묻지마라 갑자생(1924년생)’으로 일제 학도병에 동원됐으나 인류 최초의 원폭 피해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찾고 반핵평화를 위해 투쟁한 고인을 추모한다.

/김태경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미래읽기 칼럼의 내용은 국회미래연구원 원고로 작성됐으며 뉴스1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