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뼛가루 품고 고향 갈 생각만"…북송 재일교포 2세의 탈북기
"통일되면 고향 가서 살자"던 아버지…60여 년만에 고향품
"11월 UPR에 北 인권침해 권고"
- 유민주 기자
(서울=뉴스1) 유민주 기자 = 손때 묻은 낡은 사진들이 작은 사진첩에서 나왔다. 탈북자 강봉순 씨(55)에게 몇장 남지 않은 아버지 사진이다. 다른 사진들은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잃어버렸다고 한다. 북한에 남은 형제들의 소식을 수소문해 지난 2019년 브로커에게 돈 50만 원을 주고 전달받은 동생들의 사진도 있었다.
아버지는 북송 재일동포, 본인은 탈북자. 아들을 데리고 중국 대련·쿤밍, 라오스, 태국을 거쳐 지난 2010년 한국에 들어왔다. 형제들은 아직 북한에 있다. 생사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북한의 만행을 알리려고 하는 이유는 아직도 많은 동포가 북한 또는 중국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가슴 졸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강 씨는 지난 2021년부터 북송 재일동포 탈북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 '모두 모이자'의 한국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강 씨를 비롯한 '모두 모이자' 회원 등 유족 27명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재일교포 북송에 의한 인권유린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진화위는 당시 작성된 공문서와 국가기록원, 외교부 자료 등을 분석해 지난 7일 당시 북송 사건이 '인권유린'이라고 규명했다.
진화위에 따르면 북송자 대부분은 "차별 없고 일한 만큼 분배 받는다. 세금도 없다. 북한에 가면 이상사회처럼 살 수 있다. 북한이 일본보다 잘 살고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등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북송사업 선전을 믿고 북송선을 탄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북한의 실상은 선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 열등감 가득하던 성장기
오 남매 중 넷째. 위로 두 명의 오빠가 있고, 세 딸 중 둘째 딸이었던 강 씨는 12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6개월 뒤 어머니도 대장암으로 숨을 거뒀다. 서열이 분명한 북한 사회에서 북송 동포들의 생활은 온갖 차별로 인해 험난했다. 특히 강 씨 집안의 생활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급속하게 어려워졌다.
공장에 취직한 큰 오빠가 가장 역할을 이어받았지만 식구가 많은 탓에 역부족이었다. 생활이 어려운 북송 동포들은 가끔 일본에 남은 가족들이 보낸 엔화로 그나마 끼니를 해결했는데, 강 씨네는 그럴 형편조차 되지 않았다.
"공장에 다니는 큰 오빠가 세대주에게 나눠주는 배급표를 받아오면 제 임무는 그걸 가지고 줄을 서서 우리 식구 먹을 음식을 가져오는 거였어요. 늘 배불리 먹지 못했고, 매일 저녁은 늘 시래기죽이나 무죽을 먹었어요. 그때 질려서 저는 지금도 죽을 안 먹어요."
아버지는 방광암 말기였다. 강 씨 기억에 아버지는 북한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각종 고생을 자처했다. '모범 가정'에 선정되면 조금이라도 집안 살림에 보탤 수 있기에 더 열심히 자격을 갖췄지만 출신 때문에 늘 제외당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출신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 강 씨가 10살 때쯤이었다. '모범 가정'에게 상을 수여하기 전 세대주를 조사하는 공무원들이 집에 찾아왔다. 아버지의 이름을 묻고 대상자 명단을 한참 뒤적였는데 이름이 보이지 않자 아버지의 고향을 물었다. '남조선 경상남도 하동군'. 작은 수첩 하나를 가방에서 따로 꺼내 확인하더니 결국 배제됐다.
그 상황을 지켜본 강 씨는 어린 나이였지만 문득 본인이 겪었던 억울한 일들이 아버지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성적순으로 반장을 정하는 학급에서 최우수 등급의 성적을 받았지만 선생님은 이를 외면했다. 친구와 다툼이 있으면 늘 강 씨에게 먼저 "가서 빌어라"라고 말했던 선생님의 이름과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했다.
"아버지가 '자본주의 물'을 먹고 오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네 아이들이 저한테도 '일본 노랑 대가리 새끼'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그래서 그날 아이들이랑 대판 싸웠는데, 점잖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내 편을 들어줬어요. 저는 늘 그런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 같아요."
강 씨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버지가 살아생전 틈틈이 공책에 기록한 삶의 궤적 덕분이었다. 북한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낯설 수밖에 없는 한국과 일본에 대해, 또 본인의 고향에 대해 설명한 글들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주 했던 말이 '통일되면 고향 가서 같이 살자'는 거였는데, 아버지가 18세까지 살던 남해 바닷가에는 뱀장어가 있고, 쌀도 손가락 마디만큼 크고 굵직하다고 말하곤 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저도 남조선이 어떤 곳일지 늘 궁금했었는데, 제가 36살이 되도록 조국은 통일되지 않았고 북한은 계속 엉망이 되었죠."
◇ 아들 위해 탈북 결심…6년 반 만에 한국 땅으로
강 씨가 본격적으로 탈북을 결심한 이유는 아들의 교육 때문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학교생활에 적극적이던 초등학생 아들이 갑자기 학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이후 북한은 식량 배급제를 중단하며 '고난의 행군' 시기를 보냈는데, 아이들의 학교생활도 어려워졌다. 학교 선생님에게 뒷돈이나 쌀을 줘야 아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함경북도 청진시 동항구 근처에 살았던 강 씨는 창문만 열면 외국 깃발을 단 배들이 보였다고 한다. 지원 식량을 실은 배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일반 주민들은 그 좋은 쌀을 구경도 하기 힘들었다.
"적십자에서 쌀이 들어오면 다 장마당에 야매로 가요. 쌀이 주민 배급소로 곧장 가는 게 아니라 외화벌이 사업소에 들어가서 돈 있는 사람들이 그걸 사서 도매상들에게 먼저 팔고, 장마당에 나온 쌀은 한 번 더 소매업자한테 넘겨줘서 결국 살 수 있는 쌀이 없죠. 중국에서 건너온 씨눈 없는 강냉이, 말 사료 찌꺼기 가루 같은 것들만 살 수 있었어요."
강 씨는 12살 아들이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기죽어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중국에 가서 일단 큰돈을 벌어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의 뼛가루를 조금 덜어 비닐에 담아 천으로 한 번 더 감싸고 목걸이로 만들었다. 아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 목걸이를 걸고 집을 나섰다. 나중에라도 아버지 고향에 가게 되면 뿌릴 기회가 올 수 있다는 생각에 목걸이만큼은 각별하게 챙겼다.
중국 대련의 한 식당에서 돈을 번 강 씨는 2년 후 브로커를 통해 아들도 데리고 나왔다. 그러다 17살이 되던 해 사춘기를 겪던 아들이 중국 공안에 두 번 적발됐는데, 그때마다 식당 사장에게 사정해 벌금을 물며 데리고 나왔다. 위험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사장은 두 모자를 쫓아냈다.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밤 12시에 대련항에서 출발해서 쿤밍을 거쳐 라오스에 도착했어요. 10명이 함께 움직였는데, 배를 나눠서 메콩강을 건너다 어떤 배는 붙잡히기도 했어요. 저희는 운 좋게 엔진이 있는 배를 타서 빠르게 건너갔죠. 브로커가 눈앞에 보이는 곳만 넘으면 태국이라고 하더라고요."
강 씨 일행은 그때부터 태국 경찰에 붙잡히는 것이 목표였다. 태국 정부는 2008년 난민수용소에 수용된 탈북자들을 한국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원만큼 이송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으로 탈북자들을 조기 이송할 경우 아시아 각국의 탈북자들이 태국으로 몰려올 것을 우려해 추방 인원을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했지만 여전히 태국 수용소에 갇히는 것이 한국으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강 씨 모자는 2010년 여름 태국 경찰에 붙잡힌 이후 약 3일간 재판을 받아 이민국 감호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들어갔을 때는 이미 많은 탈북민들이 쇠철창 안에 숙식하고 있었다. 빠르면 한 달, 느리면 두 달 정도를 대기하면서 북한 출신이 맞는지를 조사받고 한국으로 갈 인원이 정해졌다.
"별로 크지도 않은 방에 거의 200명씩 들어가 있었는데, 더운 여름에 다닥다닥 누워서 잤어요. 다들 예민하니까 얼마나 싸우던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어요."
강 씨가 마침내 한국 땅을 밟은 건 2010년 10월 8일. 국가정보원의 조사와 하나원 교육을 받으며 해를 넘긴 3월 말이 되어야 아버지 고향을 찾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 묘 옆에 고이 간직해온 아버지의 뼛가루를 묻었다. 북한에서 떠나온 지 6년 반 만이었다.
"그동안은 제가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늘 뭔가 숨이 막혀있는 것 같았는데, 그날 묻어드리고 나서 뭔가 '쿵'하고 가슴속 응어리가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저한테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만큼 크고 소중했던 것 같아요."
◇ 내년 조총련 피고로 세운다…11월 UPR에도 '인권침해' 권고
강 씨와 같은 북송 재일동포 2세들이 활동하고 있는 '모두 모이자'는 지난 2003년 탈북한 재일동포 1세 가와사키 에이코(82) 씨가 만든 단체다. 이들은 내년 한국에서 조총련을 피고로 세우는 재판을 준비하고 있다.
앞서 가와사키 씨는 다른 북송 피해자 4명과 함께 "지상낙원이라는 데 속아 (북한으로) 가서 인권을 억압당했다"며 지난 2018년 8월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에 북한을 상대로 총 5억 엔(약 50억 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1심 법원은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북송 사업과 관련한 북한의 행위를 '이주 권유'와 '북한 내 억류'로 나눠 판단, 북한에서 발생한 억류와 관련한 재판 관할권은 일본에 없고 이주 권유로 발생한 재판 관할권은 일본에 있지만, 제소 시점에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20년의 제척기간이 지났다며 소송을 기각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열린 2심에서 일본 고등법원은 "북한의 행위는 전체를 하나의 계속된 불법행위로 봐야 하며 이 일체의 불법 행위로 발생한 침해의 관할권은 일본 재판소에 있다"면서 해당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돌려보냈다. 이에 가와사키 씨 변호인단은 최종심을 준비하고 있다.
아울러 가와사키 씨는 이번 진화위 결정에 대해 "특히 다가오는 11월에 있을 제4차 유엔 국가별정례인권검토(UPR)에 '모두 모이자'가 재일동포 북송을 인권 침해로 권고를 낸 것과 관련해서도 너무 중요한 결정"이라며 "여기에 일본에서 있을 최종심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youmj@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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