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간첩누명…국가의 사과 받아야" 납북어부들, 법정서 증언
'피고 대한민국' 상대 소송 변론기일서 납북어부 증언
납북과정, 우리 당국 구금·고문·사찰 사례 상세 설명
- 윤왕근 기자
(강원=뉴스1) 윤왕근 기자 = "처음에는 몽둥이로 때리더니 고춧가루 탄 물 들이 붓고, 전기고문을 하더군요."(납북귀환어부 김상기씨)
"이웃에게 제 동태를 살피라 하고, 집을 사면 보안과 형사들이 '무슨 돈으로 샀냐' 묻고"(납북귀환어부 김춘삼씨)
"50년 간첩 누명을 쓰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납북귀환어부 이성국 씨)
춘천지법 속초지원 민사부(재판장 김현곤 지원장)는 21일 오후 동해안 납북귀환어부 국가배상사건 5차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특히 이날 재판은 납북 피해 당사자 4명이 직접 나와 본인 신문을 통해 당시 납북과정과 우리 당국의 불법구금, 처벌과정, 불법사찰 사례를 상세히 설명했다.
이날 본인 신문에 첫번째로 나선 납북어부 김춘삼 씨는 1971년 납북됐다가 이듬해 귀환한 '승해2호' 사건 피해자다. 김 씨는 이날 당시 납북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당시 자정 무렵 오징어를 가득 싣고 귀환하는 도중에 짙은 안개가 꼈다.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안개 사이로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그쪽 배에서 표준어를 쓰는 사람이 확성기로 '어디 배입니까'라고 물었고, '속초 배입니다'라고 하니 따라오라고 한 것이 (납북의) 시작이었다"며 "납북 당시 분명 우리 영해였던 것으로 단정한다"고 했다.
당시 승해2호의 선원이었던 김 씨의 나이는 고작 열여섯. 천신만고 끝 고향으로 돌아온 소년 김 씨에게 돌아온 것은 수사기관의 불법 구금, 고문, 구타였다.
찬양고무와 같은 이념 용어부터 시작해서 각종 법률용어는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열여섯 오징어잡이 소년이 알리가 없었다.
50년 세월 당국의 사찰도 견뎌야 했다.
김 씨는 "한 날은 마당을 쓸고 있는데 보안과 형사들이 여느 때처럼 와서 '돈이 어디서 나 집을 지었냐'고 묻더라"며 "다른지역에 잠시 가면 어떻게 알고 관할서 보안과 형사가 나타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가족의 피해도 컸다.
이성국 씨는 "공부를 잘했던 막내동생은 경찰대를 가려다 나 때문에 신원조회에 걸려 지원조차 못했다. 동생이 울면서 이야기 하는데 가슴이 찢어졌다"고 증언했다.
김상기 씨는 "보안과 형사들은 단순히 우리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웃주민들에게 우리 가족 동태를 살피라고 한다. 그때부터 이웃들의 눈초리가 이상해지고, 자녀에게 '저집 아이와 놀지 말라'고 한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만 6~7차례 이사를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인생의 황혼기가 올 때까지 '간첩 누명'을 쓰고 살아야 했던 이들이 '피고 대한민국'에게 바라는 것은 진심어린 사과다.
'피고 대한민국'은 이 사건 재판에서 "납북 어부 관련 사건 재심 청구 등을 통해 노력했기 때문에 더이상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입장을 보이고 있다.
김춘삼 씨는 "1972년 11월 24일 어느 법정에서 판결을 기다렸던 그 소년은 이제 일몰처럼 인생의 사계에 저문 칠순 노인이 됐다"며 "50년 세월, 권유지를 위해 어부들에게 씌운 간첩 누명을 사과해야 한다. 미래세대를 위해서, 올바른 역사를 위해서도 사과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춘천지법 속초지원이 다루고 있는 납북어부 관련 국가배상소송은 총 33건이다. 이중 6건은 내년 1월 9일과 23일에 나눠 선고가 내려질 예정이다.
나머지 사건 또한 내년 초 모두 선고가 내려진다.
wgjh6548@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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