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육강식이야"…산림 4000㏊ 잿더미 만들고 노모 죽게 한 '토치 방화범'

[사건의 재구성]"주민들이 날 무시" 이유로 방화…축구장 5600개 넓이 태워
강릉·동해 큰 피해…법원 "불 잘 번지는 날 골라 계획 범행" 징역 12년 확정

강원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에 위치한 A 씨 거주지. A 씨가 이곳에서 지른 불은 강풍과 함께 대형산불로 번져 강릉·동해 일대 산림 4000㏊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2022년 3월 화재 당시 모습.(뉴스1 DB)

(강릉=뉴스1) 윤왕근 기자 = 2022년 6월 9일 춘천지법 강릉지원 형사법정. 연갈색 죄수복을 입고 선 한 중년 남성에게 판사가 "징역 12년을 선고한다"고 하자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약육강식이야."

이처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그는 축구장 5600개 규모의 산림 4000여㏊를 잿더미로 만든 화마(火魔)를 불러와 강원 동해안 일대를 생지옥으로 만든 A 씨(60)였다.

3개월 뒤로 돌아가 같은 해 3월 5일 새벽. 강릉의 한적한 산골마을인 옥계면 남양리엔 초속 20m 안팎의 강풍이 불고 있었다.

이 바람은 매년 봄철 이동성 고기압에 의해 강원 영서에서 영동지방으로 부는 서풍이었다. 양양과 강릉 사이에서 분다고 해서 '양강지풍'(襄江之風)이라고도 불리는 이 바람은 매년 봄철 동해안 일대 대형산불을 유발하는 주요인이기도 하다.

이미 이날 낮 경북 울진과 삼척에선 이 같은 강풍을 타고 찾아온 화마가 거대한 산림을 활활 태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새벽 1시쯤 집 밖으로 나선 A 씨는 마치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가스토치에 부탄가스를 결합했고, 손도끼까지 챙겼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싶었는지 A 씨는 준비한 토치로 자신의 집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또 집근처 야산 이곳저곳에 부지런히 불을 질렀다.

이윽고 강풍을 탄 화마는 춤을 추며 이 일대를 벌겋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불이 나자 대피령이 떨어졌고, 혼비백산한 마을 사람들은 귀중품은커녕, 혈압약 하나 챙기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불이 나자 A 씨의 어머니 B 씨(당시 86세)도 놀라 도망치다가 크게 넘어졌다. B 씨는 출동한 구조대에 의해 병원에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강원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에 위치한 A 씨 거주지. A 씨가 이곳에서 지른 불은 강풍과 함께 대형산불로 번져 강릉·동해 일대 산림 4000㏊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2022년 3월 화재 당시 감식반이 감식을 진행하고 있다.(뉴스1 DB)

양강지풍을 만난 화마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시(市) 경계까지 넘었다. 강릉에서 시작한 불은 인접한 동해시에 더 큰 피해를 줬다.

강릉 옥계에서 넘어온 불은 '논골담길'로 불리는 묵호동 등대마을 펜션과 주택 100여 채를 태웠다. 망상동 일대 산림과 주택도 잿더미가 됐고, 수백 명의 이재민도 발생했다.

불은 산림·소방당국의 사투 끝에 A 씨가 불을 지른 이후 90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꺼졌다.

A 씨의 방화로 시작된 시작된 산불로 강릉지역에서 주택 6채와 산림 1455㏊가 소실돼 111억 원 상당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동해지역에서는 주택 74채와 산림 2735㏊가 잿더미로 변해 283억 원의 막대한 재산피해가 났다.

또 이 불로 동해지역에서 53세대 111명, 강릉에서 5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방화 직후 주민 신고로 붙잡힌 A 씨가 경찰에 밝힌 범행 이유는 "주민들이 오랜 기간 나를 무시해 왔다"는 것이었다. 일대 주민들도 "A 씨가 집 문제 등으로 주민들과 마찰이 있었다"고 언론 등에 증언했다.

지난 2016년 고향으로 돌아온 A 씨는 인척의 토지에 지어진 무허가 주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거주했다. 그러나 토지 소유자로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주택에서 나가 달라”는 말을 듣자, 인척과 마을주민이 주도해 자신을 쫓아내려 한다고 의심했다.

당시 사건을 살핀 검찰은 주택과 토지 문제에서 시작된 피해의식이 고립된 생활환경에서 피해망상으로 연결, 적대감으로 표출돼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고 A 씨를 구속기소했다.

실제 A 씨가 고향을 떠나게 된 계기도 '피해망상'이었다. A 씨는 37년 전 기르던 소가 죽게 되자 마을주민이 청산가리를 이용해 소를 죽였다고 의심했다. 이후 불만을 품고 고향을 떠난 A 씨는 서울 등지에서 생활했다.

지난 2022년 3월 6일 동해안 대형산불 발생 직후 강원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의 한 가옥. 60대 A 씨의 방화로 시작된 불은강풍과 함께 대형산불로 번져 강릉·동해 일대 산림 4000㏊를 잿더미로 만들었다.(뉴스1 DB)

재판에 넘겨진 A 씨에게 1심 재판부는 "범행도구를 미리 준비한 후에 불이 잘 날 수 있는 날을 선택하는 등 계획적으로 범행했다"며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징역 15년)보다는 낮았지만, 산림보호법 위반 사건으로는 중형을 선고받은 셈이었다.

'약육강식'이라는 A 씨의 말은 이 1심 재판 선고에서 나왔다.

A 씨는 "형이 무거워 부당하다"며 항소했고, 같은 해 11월30일 열린 2심에서도 동일한 형이 선고됐다.

결국 최종심까지 간 해당 사건을 살핀 대법원 1부는 지난해 3월 A 씨가 낸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유지했다.

이후 A 씨는 2년째 복역 중이다. 그의 방화로 잿더미가 된 강릉과 동해 일대 산림은 2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야 그나마 검은 때 정도를 벗었을 뿐, 경제적 피해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주민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약육강식.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 이치'라는 의미다. 피해 망상에 시달리던 A 씨는 끔찍한 방화로 마을 주민들에게 자신이 더 '강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A 씨의 말도 안 되는 행동으로 피해를 본 것은 '불난리'에 70년 터전을 잃은 아흔살 할머니, 전 재산을 투자해 조그만 펜션 하나를 꾸린 아저씨, 세상 떠날 때 입으려고 사둔 수의도 못 챙겨 나왔다는 채만호 할머니 등 진짜 '약자'들이었다.

지난 2022년 3월 6일 동해안 대형산불 발생 직후 강원 동해시 묵호동 일대 산림이 검게 탄 모습이다. 60대 A 씨의 방화로 시작된 불은 강풍과 함께 대형산불로 번져 강릉·동해 일대 산림 4000㏊를 잿더미로 만들었다.(뉴스1 DB)

wgjh6548@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