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터' 성산일출봉 품은 조형물…제주 4·3희생자 214명 이름 새겨
터진목 해안 추모공원 '해원의 문' 제막
- 오현지 기자
(서귀포=뉴스1) 오현지 기자 = "아버지 이름 어디 있나. 여기 있네. 아버지, 저 왔습니다"
76년 전 한 살배기 딸을 두고 떠난 아버지가 향한 곳은 제주의 상징 성산일출봉을 품은 '학살터'였다.
지나간 세월 따라 일흔을 훌쩍 넘긴 딸은 아버지가 쓰러진 그곳에 새겨진 이름 석 자를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기억날 리 없는 젊은 아버지 얼굴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4·3 희생자 고두현 씨의 딸은 5일 오전 이곳을 찾아 "한 살 아기 때라 기억이 없지만, 아버지가 아무 이유 없이 수산리에서 여기까지 끌려와 돌아가셨다고 한다"며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이라도 만져보니 마음이 좋다"고 말했다.
'제주 4·3'과 관련해 지난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까지 성산지역 전체 희생자 450여 명의 절반에 달하는 200여 명이 집단 총살된 '터진목'에 그들을 기리는 조형물이 세워졌다.
'해원의 문'이라고 이름 지은 이 조형물엔 터진목 희생자 214명의 이름을 음각으로 새겼다.
둥근 액자 같은 모양의 '해원의 문'은 희생자들이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을 성산일출봉을 사진처럼 품고 있다. 이 문의 원 형태는 4·3의 비극적 역사를 넘어 해원과 상생을 뜻하고, 문을 지나면 희생자와 살아있는 이들이 평화의 길로 간다는 뜻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 바닥은 눈동자 모양으로 4·3의 역사를 바라보고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감시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조형물 위쪽으론 희생자들을 안식처로 인도한다는 의미의 새와 종이배 형태 조각을 올렸다.
터진목 학살터 일부는 이미 오래전 도로로 변해 아스팔트에 묻혔다. 수년 전 세워진 4·3 표지석이 있긴 하지만, 이곳에 가까이 와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이젠 멀리서도 눈에 띄는 3.2m 높이 조형물이 세워져 4·3 희생자 유족들에겐 위안을 주고, 도민과 관광객들에겐 4·3의 아픔을 되새길 수 있는 현장이 됐다.
오종구 성산읍 4·3 희생자 유족회장은 이날 조형물 제막식에 앞서 진행된 '성산읍 4·3 희생자 위령제'에서 "4·3의 아픔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통곡의 상흔으로 남아 있다"며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명예 회복에 전력을 다하고 있고, 오늘 숙원사업이었던 조형물 제막식도 그를 위한 의미 있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날 제막식엔 4·3 희생자 유족과 제주도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ohoh@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