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전 꽃 들고 도청 찾은 '신여성'…제주 '꽃집 대모' 됐다
[노포의 꿈]③ 제주시 연동 '로뎀나무'
시대흐름 타 사업 성공 이어 후학 양성·강의에 진심
- 오현지 기자
(제주=뉴스1) 오현지 기자 = 1987년 9월의 어느 날, 제주도청에 정장을 빼입은 서울 말씨의 여성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도청 옆에 그린꽃방이라는 꽃집을 열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제주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화려한 꽃바구니를 들고, 당당하게 가게 홍보에 나선 이 '신여성'은 38년째 꽃집 로뎀나무(구 그린꽃방)를 운영 중인 주정숙 대표(68).
서울에서 꽃을 공부하고, 남편을 따라 제주에 입도한 그는 31살 되던 해 지금 자리에 꽃집을 열었다.
주 대표는 "당시만 해도 제주에서 꽃을 공부해서 꽃집을 하는 곳보다는 그냥 늘어놓고 파는 게 일반적이었다"며 "꽃을 공부했고, 루트를 알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보다 앞서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여성이 사업을 하는 일도 드물었던 시절, 그는 능력을 발판으로 개업 후 불과 한 달 만에 주요 관공서를 거래처로 꽉 잡았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하지만, 당시만 해도 여직원들이 직접 꽃꽂이해 사무실을 꾸미는 게 유행이었다. 주 대표는 도청과 교육청은 물론 수협, KBS, 보험회사 직원들을 상대로 꽃꽂이 수업도 열었다.
시작부터 앞서갔던 그는 30여년간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 사업 모델을 시시각각 바꿔왔다.
그의 두 번째 타깃은 신혼여행 온 신부들이 무조건 찾던 '미용실'이었다. 신부들은 제주 미용실에서 조화를 꽂은 올림머리를 하곤 했는데 주 대표는 당시 도내 미용실 100여 곳에 조화 머리핀을 납품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주 대표는 "그다음엔 유흥주점 직원들이 사무실을 돌면서 홍보용으로 갖다주던 꽃을 100개씩은 맡아 만들었고, 이후에는 호텔 행사나 연회장 꽃을 주로 했다"며 "트렌드, 흐름을 잘 탔으니 이렇게 장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업 10년 만에 제주에서 가장 큰 호텔 2곳에 분점을 두고, 웨딩숍까지 운영할 만큼 성공한 그는 40대의 초입, 대부분의 사업을 정리하고 돌연 '늦깎이 신입생'이 된다. 역시 시대의 변화를 따라서였다.
그는 "90년대까지만 해도 호텔 조경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 갖다주면 보지도 않고 결제를 할 때였다"며 "그런데 제주공항의 전체적인 조경을 맡겼던 공항관리공단 지사장님이 일주일간 그린 스케치북을 보더니 이게 뭐냐, 몇천만 원을 들이는데 컴퓨터 시디 정도는 가져올 줄 알았다고 면박을 주더라"면서 웃었다.
그 길로 관광대 컴퓨터디자인과에 입학한 그는 제주대 경영학과를 거쳐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진학한다. 40대에 '전문적인 플로리스트가 되겠다'는 일념 아래 시작한 공부는 그를 '인생 2막'으로 이끌었다.
2004년 모교인 관광대에 신설된 화훼디자인과 겸임 교수로 임용된 그는 2019년까지 14년간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가 '제주 꽃집 사장은 대부분 내 제자'라고 말하는 이유다. 지금은 한라대학교에서 환경원예과 교수로 다시 교편을 잡고 후학을 키우고 있다.
주 대표는 "관광대 교수를 그만두고 좀 쉬어야지 했는데 공부를 놓지 못했다"며 "도시농업 관리사 자격증을 따고, 치유 농장이 뜨고 있던 시기라 치유농업, 원예치료 쪽을 공부한 뒤 1년에 100회 이상 출강했다"고 말했다.
학교에 나가 아이들에게 도시농업 강의를 하고, 공무원이나 경력 단절 여성·여성 농업인 대상 힐링 원예프로그램도 도맡고 있다. 3년 전부터는 가게에서 신장 투석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원예 치료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사실 38년간 운영해 온 꽃집이 '부업'으로 느껴질 정도로 지금은 외부 강의와 후학 양성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제주에 제대로 된 꽃꽂이 강사가 없다 보니 국내 최고의 플로리스트를 제주로 한 달에 한 번씩 초청하기도 했다"며 "올해는 소상공인 전문기술 교육기관 인증을 받고 꽃집만 상대로 해 강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스스로 "제주 꽃집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고 자부하는 이유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제주에서 꽃집으로는 처음으로 중소벤처기업부가 선정하는 백년가게에 이름을 올렸다.
어느새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더 나은 강의를 위해 챗GPT를 배우고 마케팅 수업도 틈틈이 받고 있다. 40년 가까이 쌓아온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나누고 싶다는 마음에서다.
"제자들이 이제 업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보니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기꺼이 발 벗고 나서요. 한 제자는 이렇게 다 퍼주면 어떡하냐는데 움켜쥐고 있어 봐야 뭐 하겠어요. 얼마든지 가져가라 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oho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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