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한강 덕에 웃어요"…50년간 동네 지킨 제주 시골책방
[노포의 꿈]① 서귀포 대정읍 '백화서점'
"서점에서 책읽던 꼬마가 어른돼 다시 찾아오면 뿌듯"
- 고동명 기자
(제주=뉴스1) 고동명 기자 = 지난 24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길가에 위치한 '백화서점'. 아마도 처음 걸렸을 때는 푸른 녹색이었던 '백화서점' 간판 색은 오랜 세월 햇볕에 바래 점차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간판 한쪽에 쓰인 'SINCE 1974'라는 문구가 이 서점의 긴 역사를 증명하고 있었다.
시골 동네서점 정문 앞 유리에 붙어있는 '2024 노벨문학상 한강 작가 도서 판매 중'이라는 홍보 전단과 서점 한편을 차지한 한강의 책들이 업계에 불고 있는 한강 열풍을 실감케 했다.
서점 안에 들어서자, 백발이 성성한 점주 허성주 씨(79)가 80에 가까운 나이에도 직접 책을 정리하며 손님을 응대 중이었다.
허 씨가 서점을 시작할 때는 무려 50년 전인 1974년 봄이었다. 백화(白花)서점은 하얀 꽃처럼 깨끗하고, 정직하게 장사를 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허씨는 책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과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품에 끼고 다녔다는 그는 여러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문을 밟지 못했다.
백화서점은 허씨의 책과 배움을 향한 열정이 발판이 됐다.
그는 "지역에 있는 아이들과 학생들이 책을 쉽게 구입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서점을 시작했다. 취미가 직업이 된 것"이라며 "서점 구석에서 몰래 책을 읽던 어린아이가 훗날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거나 의사가 돼서 찾아오곤 할 때 괜히 뿌듯하더라"고 했다.
허씨는 "50년간 서점을 운영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내 이름의 점포는 없다"며 "돈 버는 직업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하지는 않았고 현상 유지만 하자는 생각으로 운영해 왔는데 사실 경영이 너무 어렵다"고 토로했다.
가뜩이나 책을 멀리하는 시대에 백화서점 같은 동네서점이 대형서점과 인터넷 겨뤄 이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점의 주요 고객층인 아이들이 점차 줄어드는 것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백화서점에는 타격이 컸다.
허씨는 50년을 그래왔던 것처럼 지금도 성실과 근면함으로 버텨내고 있다.
허씨는 "요새는 어떤 책을 선호하는지, 학생들은 무슨 책으로 공부하는지, 나름대로 연구하고 공부한다"며 "동네 주민이 원하는 책을 직접 발품을 팔아 구해다 주면 '인터넷으로 부르는 것보다 더 빠르다'며 좋아해 주신다"고 했다.
가끔 외지에서 서점을 찾는 방문객들이 "제주 시골 마을에 아직도 이런 작은 서점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반갑기도 하고 고마워서 와봤다"라며 응원하면 자부심도 느낀다고 한다.
책에 평생을 바친 허씨에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은 여러 의미에서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는 "한강 작가 책 덕분에 그래도 요새는 매출이 괜찮은 편"이라고 웃으며 "한강의 책은 인간 간의 관계에서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삶의 힘든 과정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를 잘 묘사해 내서 호응을 얻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좋아하는 책 중 하나로 '노인과 바다'를 꼽았다. 그가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꿈 많던 젊은 시절이었지만 이제는 소설 속 노인과 비슷한 나이가 됐다.
그는 "노인과 바다는 삶의 목표를 향한 인간의 위대한 도전과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깨우쳐준 책"이라고 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할 수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는 노인과 바다의 명구가 50년의 세월을 거치며 허 씨 마음속에 점점 더 깊게 새겨졌다.
올해 봄 그는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을 겪었다. 서점뿐만 아니라 인생을 함께 꾸려온 동반자인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쉬도록 못 해준 게 너무 미안하다. 결혼하고 나서 남들은 가끔 여행도 가고 그렇게 사는데 여행 한번 못 가고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주지 못한게 한이 된다"고 했다.
그는 조만간 딸에게 서점을 물려줄 계획이다. 허 씨가 떠나도 백화서점은 계속될 것이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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