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길 어떠세요?"…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배경 된 제주 역사기행

불 타 사라진 '잃어버린 마을'…끔찍한 학살터였던 해안가
평화기념관·주정공장 수용소 등 '역사교육·치유 공간'으로

한강 작가. (뉴스1DB)2024.10.10/뉴스1

(제주=뉴스1) 강승남 기자 =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최신작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의 아픔 '4·3'을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의 화자 '경하'는 사고로 입원한 친구 '인선'의 부탁으로 제주도에 있는 인선의 집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는 인선의 어머니 기억 속 과거를 되짚는다.

한 작가는 이 책을 통해 4·3으로 가족을 잃은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는 4·3의 진실을 기억, 기록하면서 평화·인권의 상징으로 승화한 제주도민의 모습과 닮아 있다,

한 작가 소설의 배경인 제주 4·3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 발포에 의한 민간인 사망사고를 계기로 저항과 탄압, 1948년 4월 3일 봉기에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 해제 때까지 무력 충돌과 공권력에 의한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이 집단으로 희생된 사건'(제주 4·3 특별법)을 말한다.

정부가 올해 3월까지 공식 인정한 4·3 관련 희생자 수만 1만 4822명이다. 4·3 진상조사보고서(2003년 발간)에선 인명피해를 2만 5000~3만 명으로 추정한다. 4·3 당시 제주도 인구는 30만 명 정도였다.

제주에서 7년 7개월간 이어진 역사적 비극은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제주 섬 곳곳에 상처를 줬다.

제주시 화북1동의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전경. 지금도 돌담과 집터, 올레(집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작은 길) 등 옛 모습이 남아 있다../뉴스1

소설 속 인선의 집이 있던 곳은 제주 중산간(해발 200~600m)이다. 평화로운 중산간 마을은 4·3 당시 군경토벌대에 의해 불타 없어지거나 소개령 이후 재건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제주엔 이런 '잃어버린 마을'이 109곳 있다. 대부분 중산간 마을이며, 제주시 화북동 곤을동 마을은 드물게 해안마을이다.

4·3이 일어나기 전 곤을동 마을엔 67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 소대는 1949년 1월 4~5일 이틀간 곤을동을 포위, 마을주민들을 한데 모아 학살하고 집을 모두 불태웠다.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 곤을동 마을엔 지금도 돌담과 집터, 올레(집과 마을을 연결해 주는 작은 길) 등의 옛 모습이 남아 있다.

4·3 당시 제주의 아름다운 해안가 등은 끔찍한 학살터로 변했다.

한 작가 또한 2021년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기념회에서 "1990년대 후반쯤 제주 바닷가에서 3~4개월 월세로 지냈는데, 주인집 할머니가 골목 어느 담 앞에서 '이 담이 4·3 때 사람들이 총 맞아 죽었던 곳'이라고 얘기했다"고 소개했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에서 유족들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있디. 2024.4.3/뉴스1 ⓒ News1 오현지 기자

실제로도 그랬다. 제주 서귀포시 정방폭포와 인근 '소남머리'에선 1948년 11월부터 1950년 2월까지 50여 차례에 걸쳐 3세 어린이부터 여성, 노인 등 토벌대에 의해 공개 총살됐다. 당국에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255명이다.

성산일출봉을 바라볼 수 있는 '터진목'과 표선해수욕장(한모살 해변) 등에서도 무고한 이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소설 속 경하가 제주에 내려올 때 밟았을 제주공항(옛 정뜨르비행장)도 4·3과 관련해 500~700명이 학살돼 암매장됐던 곳이다.

제주엔 600개의 4·3 유적·시설이 있다. 이들 유적·시설은 참혹한 현실을 겪은 '70여 년 전 제주'와 역사적 비극에 좌절하지 않고 화해·상생의 가치로 극복한 '지금의 제주'를 기억과 기록으로 이어준다.

그중 제주시 봉개동 제주 4·3 평화공원은 4·3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과 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추념하며 화해·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인권 기념공원으로 조성됐다. 매년 추념식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공원에 들어선 제주 4·3 평화기념관은 4·3의 역사적 진실을 기록한 곳이다. 이곳엔 제주 4·3 사건 진상 보고서를 토대로 4·3의 발발, 전개, 결과, 진상규명 운동까지 전 과정이 차례로 펼쳐져 있다.

이 공원엔 4·3 희생자들 넋을 위로하는 위령 제단과 위패봉안소, 시진을 찾을 수 없는 희생자 표석 4030기가 있는 행방불명인 묘역, 희생자 이름·나이 등을 기록한 각명비 등도 있다.

제주시 건입동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과 공원 전경./뉴스1

제주시 건입동 제주항연안여객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주정 공장 옛터는 4·3 당시 최대 규모 민간인 수용소였다가 4·3을 기억·위로하는 역사교육 현장으로 다시 태어난 곳이다.

이 주정 공장은 일제강점기였던 1943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연료로 쓰기 위한 알코올을 생산하기 위해 설립했다. 일제의 대표적 수탈 장소였던 이곳은 1945년 광복 이후 산업시설로 활용되다 4·3 땐 수용소로 이용됐다.

토벌대의 무차별 학살을 피해 목숨만이라고 지키고자 산으로 피신했던 도민들은 1949년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말에 속아 주정 공장 고구마 창고에 대거 수용됐다. 이곳에선 열악한 환경과 혹독한 고문으로 수많은 도민이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건진 이들은 불법 재판을 받고 전국 각지 교도소로 이송됐으며, 대부분 한국전쟁(6·25전쟁) 직후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는 이곳 공장 터에 공원을 조성하고 '주정 공장수용소 4·3 역사관'을 지었다.

제주시 한림읍 월림리 진아영 할머니의 집도 4·3의 참상을 알리는 역사 교육터다.

진 할머니는 1949년 1월 12일 한경면 판포리에서 토벌대의 쏜 총에 맞아 턱부위가 소실됐다. 이후 그는 사촌 언니가 살던 한림읍 월림리로 거처를 옮기고 2004년 90세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싼 채 살았다.

2017년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사무소에서 열린 ‘가시마을 4·3길 개통식. .2017.10.14/뉴스1 ⓒ News1 DB

진 할머니가 돌아간 후 방치됐던 집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중문성당은 4·3의 비극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총살당한 이들이 쏟은 무고한 피를 받아낸 곳이다. 일제강점기엔 이곳에 신사가 있었다.

중문성당 부지 서쪽에 자리한 '포스리하우스'(4·3 House)는 비극의 땅에 세운 치유 공간이다. 신도와 순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제주 4·3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됐다.

제주엔 '4·3'을 기억하고 화해·상생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길'도 있다.

제주도는 2015년 동광마을을 시작으로 2016년 의귀·북촌마을, 2017년 금악·가시마을, 2018년 오라마을, 2022년 소길·아라마을까지 모두 8곳에 '제주 4·3길'을 개통했다. 제주 4·3길엔 총 13개 코스(가시·소길·북촌 1개 코스, 나머지 2개 코스)가 있고, 총연장 89.3㎞다

이곳 역시 제주도민이 겪은 통한의 역사 현장을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역사·교육 현장이 되고 있다.

ks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