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6살 주인 잃은 반려견…이웃들이 밥 먹이며 "너도 넋 잃었구나"

팔순 잔치 일가족 9명 중 4명 살던 영광 용암마을 '비통'
"유일한 아이로 마을 사랑 독차지…가족들도 한평생 이웃"

31일 전남 영광 군남면 용암마을 경로당에서 제주항공 참사로 6살배기 주인을 잃은 반려견 ‘푸딩’이 연신 방문자들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다.2024.12.31/뉴스1 ⓒ News1 서충섭 기자

(영광=뉴스1) 서충섭 기자 = "주인이 안보이니 저것도 우리처럼 넋이 나간 모양이오. 마을의 단 하나뿐인 아이였던 그 집 손녀가 강아지 안고 온 마을 돌아다니던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리요."

31일 낮 전남 영광군 군남면 용암마을의 한 경로당.

점심께가 되자 열 명 남짓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점심 준비를 했다. 묵묵히 쌀밥과 뭇국, 김치로 끼니를 때우던 이들은 문 밖에서 고개를 내미는 누르스름한 강아지에 눈길을 돌렸다.

"너도 밥을 먹어야지." 이내 한 할머니가 밥과 국을 그러모아 밖으로 향했다. 굶주렸던지 허겁지겁 밥을 해치운 강아지는 이내 경로당 앞 집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지난 29일 무안 국제공항에서 추락한 제주항공 여객기에 탑승했던 최고령 탑승자 A씨(80) 일가족 9명 중 4명이 살던 집이다. 내년 팔순을 앞두고 팔순잔치를 떠났던 A씨 내외와 두 딸과 손자 손녀, 타지의 친척들까지 9명이 변을 당했다.

주인 없는 집을 바라보는 강아지를 보며 밥을 주던 서순자 씨(83·여)도 눈시울을 훔쳤다. 수십 년 전 이곳으로 시집 온 A씨 부인과는 언니·동생으로 한 평생을 함께 지냈다.

31일 전남 영광 군남면 용암마을 경로당에서 마을 주민 서숙자씨가 제주항공 참사로 6살배기 주인을 잃은 반려견 ‘푸딩’에 밥을 주고 있다.2024.12.31/뉴스1 ⓒ News1 서충섭 기자

사고 직후 A씨 집은 남은 친척들에 의해 문이 굳게 닫혔다. 오도가도 못하고 마을을 방황하는 강아지는 A씨와 마을 주민들의 '금지옥엽'이었던 6살 손녀의 반려견 '푸딩'이다. 이 마을의 유일한 아이였던 손녀의 단 하나뿐인 친구였다.

'푸딩'이라는 이름도 손녀가 직접 짓고 밥을 먹이며 온 마을을 뛰놀아 다녔다고 한다. 한 할머니는 "얼마나 인물도 이쁘고 하는 말도 그 나이답지 않게 잘하는지 몰라. 크리스마스 때는 교회에서 재롱잔치로 춤을 췄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박수를 쳤다니까"라고 전했다. 내년에는 읍내의 유치원을 다닐 예정이었다고 했다.

늦은 나이에 손녀를 얻은 A씨의 딸은 이 마을 정보화센터 사무장을 맡아 어르신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쳤다. 젊은 사람이 고향에서 어르신들을 도와 부단히 사는 모습이 든든했다고 입을 모은다.

팔십 평생 용암마을을 떠나지 않은 A씨는 집성촌인 이곳 마을의 큰 기둥이었다. A씨와의 인연을 묻자 마을 주민 한부열씨(70)는 담배 한 개피를 금세 태우고는 한숨을 쉬며 "법 없이도 살 분들이었다. 다녀와서 팔순잔치를 한다고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한씨는 "20년 전 귀농할 때 포도 농사로 정착할 수 있게 도움을 많이 주셨다. 청년회장에 영농회장에 마을 일은 도맡으면서 행사가 있을때마다 앞장서시던 분이다"며 "그런 분이 사고를 당했으니 마을이 울음바다가 됐다. 마을에서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DNA 확인이 늦어진다니 속이 탄다"고 말했다.

이처럼 금방 돌아올 것 같았던 이웃을 한 순간에 떠나보낸 비통한 심정을 위로하려는 영광 군민들의 추모 발길도 이어졌다.

제주항공 참사로 4명의 군민이 희생된 영광 군남면의 군남중학교 학생들이 31일 면사무소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참배했다.2024.12.31./뉴스1 ⓒ News1 서충섭 기자

A씨 일가가 살던 군남면의 군남중학교 학생 일동은 이날 낮 군남면사무소에 마련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희생자 분향소를 찾아 분향했다. 학생들이 자진해서 교사들에 참배를 요청하고, 검은 추모 리본도 직접 만들었다.

학생회장인 김나영양(16)은 "새해를 앞두고 일어난 안타까운 참사 희생자가 우리 고향에 있다는 소식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참배하러 왔다"며 "다시는 이같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장세일 영광군수도 이날 오전에 참배하는 등 지역민들의 참배가 이어지며 이날 오전까지 200여명이 분향소를 찾았다.

zorba85@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