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소년이 온다 그곳?…한강 소설 속 '광주 여행'

소설 주무대 '상무관'부터 '적십자병원', '망월묘역'까지

5·18민주화운동 44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5·18 최후 항전지였던 옛 전남도청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2024.5.17/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소설 주무대 5·18 사상자 시신 안치소 '상무관'

'상무관에 있는 여든세 개의 관들 중 아직 합동추도식을 치르지 않은 것은 모두 스물여섯이었는데, 어제저녁 두 가족이 나타나 시신을 확인하고 급히 입관을 해 스물여덟이 되었다.'

(광주=뉴스1) 이수민 기자 =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무대는 5·18 당시 도청 상무관이다. 주인공 동호는 이곳에서 시신 관리를 도우며 자원봉사한다.

상무관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들의 주검을 임시로 안치했던 곳이다. 집단 발포와 무자비한 진압에 희생된 시신들이 5·18민주광장으로 집결되자 시신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가족들이 빨리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모았다.

시신들은 22일부터 상무관에 안치되기 시작해 23일 아침을 기준으로 약 30구 모였다. 당시 시신들은 관이 부족해 무명천으로 덮여있기도 했는데, 시신 부패 방지를 위해 방부제가 살포됐다.

상무관은 가족들의 통곡과 오열로 넘쳤고, 탈진한 이들도 더러 있었다.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의 수에 관한 증언은 제각각인데 27일 검시를 하며 작성한 기록을 토대로 하면 60여 구가 안치됐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지난 2019년 5월 17일 오후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5·18 전야제'에서 80년 5월 당시를 재연하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 2019.5.17/뉴스1

민주 횃불 대행진이 열린 곳 '민주광장과 분수대'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소설 속 80년 5월 광주의 그날을 겪은 이들은 살아남은 죄책감으로 분수대의 '물'을 두고 격분한다.

금남로1가 5·18민주광장은 1980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민족민주화성회'가 개최됐던 곳이다. 또 그 뒤로 위치한 옛 전남도청은 5월 27일 계엄군에 최종적으로 진압될 당시까지 시민군이 마지막 거점으로 삼아 최후의 저항을 펼치던 곳이다.

5·18민주광장은 5월 항쟁 이후에도 각종 5·18 관련 집회나 시국관련 집회, 촛불집회 등 광주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공간이 됐다.

1987년 7월 고 이한열의 망월동 5·18구묘지 안장 이후 많은 민족민주열사들의 유해가 광주로 향했으며,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망월동 안장에 앞서 이곳에서 노제를 지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분수대 옆 시계탑은 매일 오후 5시 18분 광주 5·18을 상징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연주한다. 시간을 맞춰 이 곡을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옛 광주적십자병원 전경.(광주시 제공)/뉴스1

사상자 응급치료와 헌혈이 있었던 곳 '적십자병원'

'오늘 적십자병원에서 오는 죽은 사람들은 모두 몇이나 될까.'

당시 적십자병원은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이었다. 그래서 항쟁 초반부터 부상당한 환자들의 방문이 쇄도했다.

적십자병원은 계엄군의 발걸음 또한 잦은 병원이었다. 때로는 도망친 시위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혹은 이들 또한 치료를 받기 위해 이 병원을 찾았다.

의료진은 산부인과 등에서 새우잠을 자며 환자들을 돌봤고 부상자들을 돌볼 인력이 부족하자 시민들의 도움도 컸다. 다치지 않은 시민들은 부상자의 간호부터 의료인들의 먹을 것까지 챙겼고, 시신을 처리하는 일도 도왔다.

병원 앞에서는 헌혈 행렬이 크게 쇄도했는데 계엄군은 사상자를 호송하는 적십자 차량에도 집중사격을 가해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5·18민주화운동 제44주년 기념식이 열린 지난 5월 18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공동취재) 2024.5.18/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희생자의 안식과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 '5·18구묘지'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소년이 온다'는 무자비한 국가의 폭력의 결과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평범한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졌으며 죽은 생명들의 억울함과 안타까움은 시신이 되어 가족에게 돌아온다.

오월 희생자들이 안치된 5·18구묘지는 광주시립공원묘지, 망월동공원묘지, 5·18희생자묘역, 망월동묘지, 5·18묘지, 망월동 5·18 구묘역, 민족민주열사묘역 등 다양하게 불린다.

5월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점령한 뒤 희생자 시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현안이 됐다. 당시 잠정적으로 파악된 시신은 상무관 61구, 도청 26구, 국군통합병원 16구, 교도소 앞 1구, 광주역 6구, 효덕동 4구, 광주고등학교 앞 2구 등 총 116구였다.

입관되지 않은 시신들의 상태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부가 1985년에 공식 발표한 민간인 희생자 수가 164명이었음을 감안하면 희생자 시신들 위치가 모두 파악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여기저기에서 시신이 발견됐고 암매장된 시신도 확인됐다. 이후 유가족들이 정부의 협박과 위협을 동반한 해체공작에 끝까지 항거해 5·18구묘역을 지켜냈다.

1987년 이한열 열사의 망월동 구묘지 안장 이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들이 전국에서 광주로 향했고, 5·18구묘지에 안장되면서 이곳은 세계 민주화의 성지가 됐다. 주차장 부지에 '5·18 정신계승 민족민주열사 유영봉안소'도 건립돼 있다.

5·18민주화운동 44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5월 17일 전남 광주 동구 전일빌딩245을 찾은 학생들이 1980년 당시 총탄 흔적을 살펴보고 있다. 2024.5.17/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총알은 그날을 기억한다…'전일빌딩245'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작품은 에필로그에서 전 대통령 전두환이 집단발포 직전인 5월 21일 오전 군용 헬기를 타고 와 광주의 땅을 밟았다고 설명한다.

그가 성큼성큼 헬기를 등지고 걸어와, 마중 나온 장교와 힘차게 악수를 나눴다고 한다.

소설과 달리 전두환은 생전 자신이 발포 명령을 하지 않았다며 관련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전일빌딩에는 여전히 '헬기사격'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일빌딩은 1968년 12월 10일에 지하 1층, 지상 7층으로 건립됐다. 이후 두번의 증축과 확장을 거쳐 현재와 같은 10층 건물로 변모했다.

1980년 당시 전일빌딩은 도청 정면에 위치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금남로 1가 1-1번지에 위치해 상징성이 컸다. 또 언론사와 방송국이 입주해 있어 계엄당국의 주시 대상이었다.

5월26일 계엄군의 재진입 소식이 들려오자 항쟁지도부는 전일빌딩을 전략적으로 사용했다. 전일빌딩의 높이를 이용해 바깥 상황을 널리 살피고자 옥상에 시민군을 배치했다. 이 때문에 제11공수여단 제61대대가 전일빌딩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2010년대에 들어 광주시는 전일빌딩을 리모델링하기로 했는데, 안전점검과 현장 검증을 하는 중에 총탄 자국이 발견됐다.

이후 광주시가 발족한 '5·18진실규명지원단'은 2017년 5월 '1980년 5월27일 새벽 4시~5시30분 제1항공여단 제61항공단 예 202·203대대 소속 UH-1H 헬기 1대가 제11공수여단 제61대대 제2지역대 제4중대의 전일빌딩과 광주YWCA 진압작전을 지원·엄호하기 위해 호버링 상태에서 본 기종에 장착된 도어건 M60 기관총으로 전일빌딩 10층 등 건물 전면부에 수백 발의 공중 사격을 했다'고 발표했다.

전일빌딩은 2017년 8월11일 사적지 제28호로 지정됐으며 감식 때 발견된 245발의 의미와 번지수 245번지임을 고려해 '전일빌딩245'로 2020년 5월 개칭해 재개관했다. 이후 25발의 총탄흔적이 추가로 발견돼 현재는 270여 발의 총탄흔적이 보존돼 있다.

breath@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