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노역 유족, '사도광산' 일본 전범기업 상대 손배소 일부승소(종합)

법원 "미쓰비시광업,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적극 편승"
'사지를 넘어 고향까지' 책 낸 피해자 유족도 승소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고 이상업 씨가 살아생전 일제강제동원 기억을 남긴 스케치.(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2024.8.27/뉴스1

(광주=뉴스1) 최성국 기자 = 일제 전범기업에 끌려가 구타와 모진 노역으로 사망할 때까지 후유증을 겪은 피해자들의 유족이 4년 7개월에 걸친 손해배상소송에서 일부 승소를 거뒀다.

광주지법 제11민사부(재판장 유상호)는 27일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9명이 미쓰비시 머티리얼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측 6명의 일부 승소 판결을, 원고 3명에 대해선 청구 기각 판결을 내렸다.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전신은 미쓰비시 광업으로, 미쓰비시 광업은 일제강점기 최근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된 사도광산 등지에 조선인들을 강제노역시켰다.

재판부는 원고 중 6명에 대해서는 일본강제동원 피해를 인정해 일본 기업이 4명에게 각 1억 원을, 1명에겐 7647만 원, 1명에겐 1666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재판부는 나머지 3명의 원고 청구는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일본의 핵심적인 기간 군수산업체의 지위에 있던 미쓰비시광업은 일본국 정부의 인력동원 정책에 적극 편승해 인력을 확충했다. 일본 정부는 한반도의 한국인들을 강제로 연행해 일본으로 보내거나 좋은 조건을 내세워 모집, 일본으로 보낸 후 구타, 감금 등 혹독한 처우를 하며 강제노동에 종사하도록 했다. 이는 심각한 불법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미쓰비시광업은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 식민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을 위해 침략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과거 일본국 정부에 적극 협력해 피해자들을 강제노동에 종사하도록 한 점이 인정된다"며 "입증증거가 없고, 고의 또는 과실이 없으며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피고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적시했다.

원고 측 피해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모친 고초를 겪고,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귀국 후에도 강제노역 후유증을 겪었다.

담양에 거주하던 표 모 씨는 1943년 8월 논에서 김을 메다 주재소 순사에게 붙들려 끌려가 일본행 배에 강제로 탑승됐다. 그는 1945년 9월 20일까지 일본 나가사키현에 위치한 미쓰비시 사키토 광업소에서 강제노역을 당했고 갖은 학대, 구타로 하반신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는 해방과 동시에 이웃 5~6가구와 목선을 임대, 갖은 고생 끝에 마산항으로 돌아와 40여 년의 병고 끝에 사망했다.

보성군에 거주했던 한 모 씨는 1942년 10월부터 사키토 광업소에서 강제노역을 당했다. 이 피해자는 탄광굴이 무너져 현지에서 사망했다. 해방 후 함께 강제동원됐던 지인이 유골을 수습해 와 마을에 안장됐다.

영암군에 살던 고 이상업 씨는 가마야마다 탄광에 강제 동원돼 2교대 근무를 하며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당시 이 씨는 16살의 미성년자였다. 지하 1000m 굴속에서 채굴 채탄작업 등 중노동을 하던 이 씨는 심폐증이 생겼다.

이 씨는 살아 생전 탄광에서의 기억을 떠올려 직접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일제강제징용 수기인 '사지를 넘어 고향까지'라는 책도 집필했다. 이 책은 일본어판으로도 출판돼 일본에 소개됐다.

해당 사건을 제외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일본기업 대상 손해배상소송은 광주지법에 14건이 계류돼 있다. 이중 6건은 항소사건이고 8건은 1심 재판 중이다.

star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