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서해랑길을 가다…⑥'쪼깐 쉬어가는' 해안 낙원길(11코스)
"길을 간다는 것은 종점에 닿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발자국을 쌓는다는 것"
- 조영석 기자
(진도=뉴스1) 조영석 기자 = 진도 서해랑길 11코스는 지산면 가치(加峙)마을 정류장에서 시작해 쉬미항까지 22㎞에 달하는 구간이다. 오뉴월 햇살에 몸을 맡긴 채 콘크리트 해안도로와 마을길을 따라 이어진 먼 길을 가야 한다. 만만치 않을 그 길에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길 것인가. 길에서 만나는 눈 맞춤의 모든 것이 나의 가난한 역사를 채우는 풍요로운 서사가 될 것이다.
◇'찔레꽃머리'에 찔레가 하얗게 피고...
설렘의 손길로 신발 끈을 조이는데 향긋한 내음이 들숨에 가득 찬다. 라일락 꽃향기인가 했더니 마을 초입의 멀구슬나무가 연보라 꽃다발을 살랑이며 흩뿌리는 향기다. 우리도 한 번쯤 이런 향기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향은 매혹적이다.
오늘 하루의 시간이 멀구슬나무 꽃향기처럼 흐르길 기대하며 길을 시작한다. 길은 가치마을 고샅길을 따라 10여분쯤 걷다보면 바닷가 풍경이 펼쳐지는 '진도낙원해안로- 주황빛 낙원길'을 만난다. 해안로는 낙조로 유명한 세방낙조 전망대로 가고, 서해랑길은 길 건너 가치방조제 둑방길을 타고 바로 간다.
가는 길에 초여름의 꽃들이 나도 피고 너도 피어 한 세상을 이뤘다. '찔레꽃머리'에 찔레가 하얗게 피고, 괭이밥은 하얀나라, 분홍나라로 나눠 피었다.
이른 꽃은 금(金)이 되고 늦은 꽃은 은(銀)으로 빛나는 금은화도 피고지고, 엉겅퀴도 날선 가시 끝에 자주빛 꽃봉오리를 무심히 열었다.
자세히 보면 길섶의 잔디도 분가루 같은 작은 하얀 꽃을 피어 검은 씨앗을 키우고 있다.
◇해찰부리기 좋은 날
산기슭에서 붉게 익어가는 산딸기 한 두 개 따 입에 물고, 앞산에 걸린 구름 한 점 두 눈에 넣으며 해찰부리다 문득 깨닫는다. 길을 간다는 것은 종점에 닿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발자국을 쌓는다는 것임을. 생각에 떼는 발길이 가볍다.
서해랑길 구간은 연안 너머로 보이는 금노항을 경유하지만 해안 지름길을 놔두고 오른쪽으로 휘돌아 금노마을을 거쳐 간다.
금노항부터 기나 긴 콘트리트 해안도로가 시작된다. 해안도로 오른쪽으로 쌍봉낙타의 혹 같은 검망산의 암봉이 우뚝하고, 왼쪽 벼랑아래로 시골마을 버스정류장 마냥 금노항이 내려 앉았다.
◇오묘한 손가락·발가락섬의 철(凸)과 요(凹)
금노항을 지나 이어지는 '해안도로전망대 쉼터'에 오르면 조도면 가사도군의 경이로운 절경이 펼쳐진다. 수도하던 스님이 풍광에 취해 바다에 빠져 죽고, 스님이 입었던 가사(袈裟)가 가사도로 변했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건너편 바다에 철(凸)과 요(凹)의 형상으로 떠있는 한 쌍의 작은 섬은 오묘함의 극치로 시선을 끈다. 섬 꼭대기에 바위 봉우리 하나 우뚝 솟아 손가락섬이라 불리는 주지도와, 마찬가지로 섬 꼭대기에 엄지·검지발가락을 닮은 바위가 솟아 발가락섬이라고 부르는 양덕도다.
섬과 섬 사이에 닿을 수 없는 바다가 놓이고, 두 섬은 해무(海霧)를 불러 은밀한 안부를 전한다. 손가락바위는 생김새로 인해 남근바위라고도 부른다.
◇하보전마을 돌기둥
끝없이 이어지던 해안도로는 무척추동물시험관과 도서지역산림생태관리센터, 진도 보전 전복 영어조합 법인을 잇달아 지난 뒤 하보전마을로 들어서면서 마무리된다.
지력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 앞으로 보전간척지가 끝없이 펼쳐지고, 모내기를 앞둔 정리된 논에 일손을 대신한 트랙터만 홀로 바쁘다.
하보전마을 초입에 족히 2m가 넘는 돌기둥 한 쌍이 사찰의 당간지주처럼 서 있다. 20년 전 마을 노인회에서 세운 마을 수호석이다. '우리 마을 후세에게 영원한 평안과 번영을 지켜줄 것이다'는 비문의 염원이 노인의 주름진 손등마냥 숙연하다.
길은 마을 끝에 위치한 제칠일안식일교회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논길따라 갈두선착장으로 향한다.
이정표의 '쉬미항 11.6㎞'라는 표식으로 구간의 절반 지점에 닿았음을 가늠한다. 가치마을에서 출발한 지 세 시간만이다.
◇방조제를 지나 방조제로 가는 길
갈두마을 앞을 지나 갈두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만수면적 2만6000여평의 인공호수인 보전호가 바다처럼 펼쳐지고, 호수 너머 보전방조제가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다.
진도땅은 바닷물이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갈퀴 모양의 만입이 발달한 탓에 간척지 조성을 위한 방조제가 해안가에 잇따른다.
보전방조제를 지난 길은 해안도로를 따라 안치마을 방조제를 거쳐 둑방길이 1.9㎞에 달하는 대홍포방조제로 향한다.
대홍포방조제 옆에는 갈 길을 잃은 바다가 사리 썰물에 맨살을 드러내고,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맨살의 갯벌 위로 갯골이 혈관처럼 흐른다.
보전방조제를 지나 언덕길을 오르는데 왼쪽 바다 멀리서 손가락, 발가락 섬이 다시 얼굴을 내민다. 먼 길 떠나는 친구를 배웅하듯 자리를 뜨지 않고, 길손의 지친 발길을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안치마을 방조제에 닿으면 종점까지 '3.2㎞'라는 이정표와 함께 대홍포방조제 너머로 쉬미항이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행 팁 서해랑길 11코스는 가치버스정류장- 금노항- 하보전마을- 갈두항- 보전방조제- 대홍포방조제- 쉬미항까지의 22㎞ 구간이다. 6~7시간 소요되는 평이한 길이지만 3만보를 넘게 걷는 먼 거리와 콘크리트 해안도로로 이어져 심리적 난이도는 상당하다. 갈림길에 이정표가 없는 경우가 많아 길을 잃기 십상이고, 쉬미항까지 쉼터나 휴게시설이 전무하다. 종점인 쉬미항에 민박시설과 편의점이 있다. 시간이 된다면 구간 경유지는 아니지만 세방낙조 전망대에 들려 일정의 마침표를 찍는 것도 화룡점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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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날이 풀리고 산하엔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습니다. 길 따라 강 따라 굽이굽이 얽힌 삶과 역사의 흔적을 헤아리며 걷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이 '서해랑길'을 따라 대한민국 유일의 '민속문화예술 특구'인 진도구간을 걸으며 길에 새겨진 역사, 문화, 풍광, 음식, 마을의 전통 등을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신들메를 고쳐 매고 함께 떠나볼까요.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