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장남과 전두환 손자의 대신 사죄…"같지만 달랐다"
노재헌씨 6차례 광주 방문 사죄에도 '진정성' 논란
전우원씨 "전두환은 학살자" 공개 사죄..."진정성 보여"
- 최성국 기자
(광주=뉴스1) 최성국 기자 = 사죄 없이 세상을 떠난 1980년 5월 광주학살의 책임자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을 대신해 아들과 손자의 대신 사죄가 이어지고 있다.
광주시민과 국민 앞에 한마디 반성이나 참회도 없이 떠난 이들을 대신한 후손들의 사죄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5·18 피해자들의 반응은 미묘한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 노태우 장남 재헌씨 6차례 광주 방문 '사죄'
두 학살 책임자의 후손 중 먼저 광주를 찾아 사죄한 건 노태우씨의 장남 재헌씨다.
재헌씨는 아버지가 투병생활 중이던 2019년부터 세상을 떠난 직후인 2021년과 지난해까지 모두 여섯 차례 광주를 찾았다.
첫 광주 방문은 2019년 8월23일로 재헌씨는 비공개로 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참배 소식은 사흘 뒤 참배 사진이 공개되면서 뒤늦게 알려졌다.
재헌씨 측은 당시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5·18묘역에 다녀와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언급해 재헌씨가 묘역을 찾았다"고 전했다.
재헌씨는 그해 12월6일 다시 광주에 내려와 오월어머니집에서 5·18 피해 당사자와 유족을 만났다.
그는 "그만하라고 하실 때까지 사과하고 싶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사과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으니 살아계시는 동안 광주를 자주 찾고 싶다"고 밝혔다.
이듬해인 2020년 5월29일에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명의로 된 근조 화환을 5·18민주묘지에 헌화했다.
근조 화환에는 '5·18민주영령을 추모합니다. 제13대 대통령 노태우'라는 리본이 달렸다.
재헌씨는 이듬해인 2021년에도 4월21일과 5월25일, 12월27일 등 잇따라 광주를 방문, 5·18 시민군 최초 결성지인 광주공원을 둘러보고 5·18 관련 연극을 관람하기도 했다. 지난해 5월에도 고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의 장례식이 엄수된 광주를 찾았다.
당시 재헌씨는 "(아버지가) 40년 민주화 과정에서 광주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께서 못하신 것은 다른 분이라도 받아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노력할 생각이다"고 밝혔다.
또 "전두환씨 둘째 아들과도 친분을 갖고 있다"며 "지금처럼 혼자 광주를 찾고 사죄하기보다는 그를 설득해 함께 진실을 밝히는 데 노력해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 전두환 손자 우원씨 광주 찾아 "할아버지는 학살자"
5월 학살의 최고 책임자인 전두환씨의 후손 중에서는 손자 전우원씨가 처음으로 광주를 찾았다.
5·18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사죄하겠다는 뜻을 밝힌 그는 마약투약 혐의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지난달 28일 오전 미국에서 귀국, 경찰 조사를 마친 29일 오후 7시45분쯤 석방된 후 약속대로 광주로 향했다.
30일 하루 숙소에서 쉬며 개인 일정을 보낸 후 31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 1층 리셉션홀에서 '5·18유족, 피해자와의 만남' 행사에 참석, 공식 사죄했다.
우원씨는 "할아버지 전두환씨는 5·18 앞에 너무 큰 죄를 지은 죄인이자 학살자"라고 했다.
또 "할아버지는 5·18에 대해 이야기 하면 폭동이고, 우리 가족이 피해자라고 했다. 전두환씨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역행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유족들 앞에 무릎꿇고 사죄했다.
5·18기념공원 추모승화공간과 국립 5·18민주묘지도 참배했다.
방명록에는 '저라는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여기에 묻혀계신 모든 분들이십니다'라고 적었다.
전두환씨의 배우자이자 우원씨의 할머니인 이순자씨가 '남편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아버지'라고 한 발언을 패러디한 글이었다.
5·18 묘지에서는 오월 첫 희생자 김경철 열사, 12세 나이로 계엄군 총에 맞아 숨진 전재수군의 묘, 행방불명자 묘역 등을 돌며 자신의 겉옷으로 묘비를 일일이 닦아내기도 했다.
오후에는 옛 전남도청을 방문, 전남도청지킴이 어머니들 앞에서 큰절을 하며 또다시 사죄했다.
◇두 후손의 같은 사죄 엇갈린 평가
두 후손의 '사죄' 행보에 광주시민과 5·18 피해자들의 평가는 다소 엇갈렸다.
재헌씨는 아버지의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 인정과 5·18에 대한 구체적 사죄 발언 대신 간접적으로만 5·18을 언급하며 대신 사죄했다. 5·18 피해자들과의 만남도 비공식으로 진행했다.
5·18 피해자와 유족, 5월단체 등은 노태우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 당사자의 진정성있는 사과와 5·18 진상규명을 위한 실질적인 자료 제출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노태우씨가 끝내 직접 사죄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의 사죄 행보도 빛이 바랬다.
5월단체 등이 지속적으로 요구한 노태우 회고록 개정도 이뤄지지 않았다. 노태우씨는 지난 2011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로 표현했다.
또 "5·18운동은 유언비어가 진범이다.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왔다'는 등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했다"고 왜곡했다.
5·17계엄확대도 "서울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치안유지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며 신군부의 내란을 합리화해 논란이 됐다.
오월어머니집 측이 자식 입장에서 왜곡된 부분을 수정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재헌씨는 "(회고록은) 아버지 입장이기 때문에 수정은 어렵다. 다만 이에 대한 생각 등을 정리해 아버지 사망 1주기 쯤 발표하겠다"고 했으나 후속 조치는 이어지지 않았다.
5월단체는 재헌씨의 사죄 행보에 "학살을 부인하는 전두환과 다른 행보로 큰 의미가 있다"고 일부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참배인지, 아니면 희생당한 분들에게 내가 무슨 이유로 죄를 지어 사죄한다는 것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전우원씨의 행보에 대해서는 '진정성을 높게 산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우원씨가 직접 유족과 피해당사자를 만나 순수하고 진정어린 사죄의 마음을 보이는 것을 많은 국민들이 지켜봤고, 그 중에는 가해 당사자나 그의 자식들도 있을 것"이라며 "이걸 계기로 당사자나 그의 후손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고백·증언, 더 이상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사죄와 용서로 나아가면 좋겠다"고 평가했다.
고 조비오 신부의 조카 조영대 신부는 "예전에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도 사죄했는데 그때보다 더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면서 "전씨 집안이 광주에 끼친 엄청난 만행을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사죄하는 부분에 대해서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우원씨의 행보에 대해 재헌씨는 해외 일정 중에도 "광주시민, 일반 국민들처럼 전우원씨 행보 지켜보고 있다. 계속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5·18유족, 피해자, 광주시민들로부터 진정성을 인정 받은 전우원씨의 사죄가 재헌씨를 포함한 다른 학살책임자 가족들의 진정한 사죄로 이어질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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