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인파로 알고 5·18가족에 손 내밀더니…권총 장전 '철커덕'"

[5·18 정신적 손해배상㊳] 오월어머니 장삼남씨
"사죄 없이 죽어버린 전두환…난 여전히 그날을 살아"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2일 오후 광주 서구 화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오월어머니 장삼남씨(83)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있다. 2022.9.4/뉴스1

(광주=뉴스1) 박준배 이수민 기자 = "아들이 손톱 발톱 다 뽑혀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을 봤는디 잠이 오겄소?"

지난 2일 오후 광주 서구 화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오월어머니 장삼남씨(83). 그는 "할 말이 많다"고 했다.

그는 오른쪽 고막이 없어 소리를 잘 못 듣는다며 큰 목소리로 질문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40여 년 전 그날의 기억을 봇물 터지듯 쏟아냈다.

장씨의 5·18에 대한 기억은 여느 민주유공자와 달리 핏빛으로 물든 1980년 5월 광주가 아니라 이듬해인 1981년 2월18일부터 시작했다.

장씨를 비롯한 '오월어머니회' 회원들이 '그놈'을 처음 만난 날이다. 장씨는 5·18 광주학살 최고 책임자인 전두환을 '그놈'이라고 불렀다.

"아들내미를, 내 새끼를 그러코롬 만들어놨는디 나가 가만히 있어? 어찌 그래, 애미가…. 그놈은 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아도 씨언찮을 것인디 말도 없이 죽어부러써."

전 대통령 전두환씨가 5·18민주화운동 9개월 뒤인 지난 1981년 2월18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지나며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제공) 2022.9.22/뉴스1 ⓒ News1DB

1980년 당시 장씨는 둘째 아들과 함께 광주공원 인근의 한 주택에서 살았다.

큰아들은 돈을 벌겠다며 집을 나가 서울살이를 하고 있었고 둘째 박철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장씨는 두 아들을 스물여섯 살 때부터 홀로 키웠다. 육군 대위였던 남편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80년 5월, 장씨는 식당에서 일하고 틈틈이 교보생명 보험 회사도 다니며 생계를 꾸렸다.

며칠째 거리에서 학생들이 군인들과 싸움을 벌이는 것은 알았지만 돈벌이에 급급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26일 오후,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식당 일을 하고 있는데 전남도청 근방에 살던 친구가 허겁지겁 장씨를 찾았다.

"아야, 삼남아, 니 아들이 도청에 있드라. 니가 어떻게 키운 자식인디…. 거기 있다간 죽겄드라."

장씨는 깜짝 놀라 곧바로 전남도청으로 뛰어갔다. 아들은 카빈총 한 자루를 쥐고 있었다. 얼른 집으로 가자고 손을 끌었지만 아들은 단호했다.

"엄니, 내가 사람을 죽이겄어요? 걱정 마쇼. 너도나도 다 무섭다고 집에 가불믄 우리 광주는 누가 지킨다요. 낼 들어갈랑께 언능 집으로 가쇼."

아들 옆에는 광주 신광성결교회 유연창 목사의 아들 유동운씨가 함께 있었다. 유연창 목사는 당시 '시국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고, 아들 동운씨는 당시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동운씨가 거들며 장씨를 안심시켰다.

"어머님, 제가 앞으로 성직자가 될 사람인데 숨어있기엔 염치가 없습니다. 아드님과 함께 도청을 지키겠습니다."

어린 아들을 도청에 남겨두고 가는 것이 걱정스러웠지만 목사 아들이 함께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됐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인 27일 아침 전남도청으로 갔다. 금남로 거리 입구부터 곡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은 피범벅이 된 도청과 거리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5·18 희생자들이 임시 안치된 상무관에는 장씨 또래의 어머니들이 아들이나 남편을 찾겠다고 시신을 뒤지고 있었다. 장씨도 떨리는 손으로 희생자들을 살폈다. 유연창 목사의 아들 동운씨는 숨져있었다. 장씨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들 찾을라고 열흘 넘게 날마다 도청 앞으로 나갔제. 근디 어느 날 한 군인 대위가 '왜 날마다 나오냐'고 물어봐. 아들을 찾는다고 항께 상무대 후문으로 가보라고 하드라고."

상무대 후문에서 중사 한 명을 만났다. 수중에 있던 돈 8만 원과 담배를 쥐여줬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8000원이었다. 집 전화번호와 아들의 이름,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아들을 찾아달라고 했다.

잠시 뒤 중사가 밖으로 나와 "박철은 죽었다"고 말했다. 장씨는 펑펑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땐 그냥 나도 죽어야겄다 했어. 아들내미 죽는 것을 말리지도 못 허고 그대로 두고 왔응께. 이거시 다 못난 애미 탓이다 시퍼서."

몇 시간 뒤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그 군인이었다.

"아줌마, 아줌마 아들은 살아있어요. 박철이란 이름이 두 명이에요."

아들은 구속돼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있다는 말에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하루빨리 아들을 석방시켜야 했다.

그해 10월 '구속자 가족 모임'이 처음 결성됐다. 이 모임은 나중에 광주 항쟁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구속·부상을 입은 피해자 가족들의 여성 모임인 '오월어머니회'로 바뀐다.

구속자 가족 모임으로 사는 건 험난했다.

저녁이면 혼자 사는 집에 형사들이 찾아와 장씨를 감시해야 한다며 옆방에서 자고 가곤 했다.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장씨는 재판이 열리는 날 방청하러 갔다가 아들의 처참한 몰골을 봤다. 양쪽 손톱과 발톱은 다 뽑혀 피가 뚝뚝 흘렀고 얼마나 구타를 당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구속자 가족들은 5·18과 관련해 사형 선고 반대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했다.

'김대중의 사주를 받아 광주사태가 일어났다'고 덮어씌우려는 신군부의 내란 조작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증거와 증인을 수집해 법원에 제출했다. 서명과 탄원서를 받아 청와대에도 냈지만 사형과 무기징역 판결을 막지는 못했다.

당시 재판 진행 상황은 조작되거나 삭제돼 기록이 부정확하지만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80년 10월25일 계엄 보통 군법 회의 선고 공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5명, 무기징역은 7명, 징역형은 163명이었다.

사형은 정동년·배용주·박노정·김종배·박남선씨 등 5명, 무기징역은 홍남순·정상용·허규정·윤석류씨 등 7명이었다. 장씨의 아들 박철 군은 징역 7년 형을 받았다.

장씨는 구속자 가족 모임과 함께 '사형수를 없애달라' '구속자를 석방하라'며 매일같이 시위를 벌였다.

전 대통령 전두환씨가 탄 차량이 5·18민주화운동 9개월 뒤인 지난 1981년 2월18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지나고 있는 모습.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제공) 2022.9.22/뉴스1 ⓒ News1DB

그 와중에 81년 2월18일 상무대 군인들과 학생들로부터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80년 5·18민주화운동이 끝나고 그해 9월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이 초도순시 차 광주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광주 서구 까치고개를 넘어 북구 유동 삼거리를 지나 금남로 전남도청에서 브리핑받는다고 했다.

장씨는 구속자 가족 모임과 함께 도청 앞에 모여 전두환을 기다렸다.

"애지중지 키운 막내아들을 그라고 맨든 놈이 감히 또 광주에 온다고 허니 그놈을 쥑이고 따라 죽든, 사죄를 받고 아들을 돌려받든 끝장을 봐야쓰겄다고 맘묵은 거지."

한 어머니는 아이 기저귀 가방 안에 '사형수를 없애주세요' '구속자를 석방해주세요'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담고 있었다.

금남로 도로에는 동원된 공무원을 비롯한 시민들이 길게 늘어서 환영 행사를 하고 있었다. 경비는 삼엄했다.

멀리서 경호 차량 1대가 앞장서고 뒤이어 전씨가 탄 차량이 들어섰다. 가족들은 플래카드를 꺼내 들었으나 곧바로 경호원들과 형사들에게 빼앗겼다.

플래카드가 막힌 가족들은 동시에 전씨의 차량 앞으로 뛰어들었다. 가족들이 뛰어들자 차 안에 있던 전두환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가족들의 손을 잡았다.

"전두환이 환영 인파인 줄 알고 손을 내밀드라고. 우리 가족들이 차 앞으로 뛰어가 드러눕고 차를 막아선께 그제야 차량이 후진하기 시작해. '전두환 이 살인마야. 내 아들 돌려줘'라고 소리질렀제."

순식간에 벌어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현장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무장한 경호원들은 곧바로 권총을 꺼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아직도 안 잊혀져. 아들 돌려주라고 한디 경호원들이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드라고. '철커덕' '철커덕'. 그 순간 시민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보호항께 총을 쏘지는 못했제."

전씨는 차량을 돌려 전남도청으로 들어갔고 가족들은 전남도청 앞에서 전두환을 만나게 해달라고 농성했다.

시민들이 도청 안으로 들어오는 걸 우려했던 신군부는 가족들만 들어오게 했다. 모두 13~4명 정도가 도청에 들어가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전남부지사 등을 만나 입장을 전달했다.

전두환은 만나지 못했지만 전남도청 안으로 들어간 가족들은 이후 별다른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문제는 가족들 중 미처 전남도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5명이었다. 여자 4명과 남자 1명, 장삼남씨도 그중 1명이었다. 이들은 수갑을 찬 채 동부경찰서에 끌려갔다. 장씨는 도청 밖에 있던 가족들이 주동자로 몰려 '죽도록' 맞았다고 했다.

"'야 이 X아, 우리 행님이 내려오신디 차를 잡고 흔들어야' 함시로 군인들에게 귓방망이를 맞아서 고막 한쪽이 나갔제. 난중에는 곤봉으로 때린디 2대, 3대 맞을 때는 눈에서 불이 번뜩번뜩 났는디 그 뒤로는 한나도 안 아퍼. 밤새 맞았지."

장씨가 경찰에 끌려가 폭행 당한 뒤 병원에서 촬영해둔 사진. 목과 어깨 부근에 붉은 멍이 들어있다. (장삼남씨 제공) 2022.9.4/뉴스1

밤새 이어진 폭행 후 신군부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김대중씨가 도움 줘서, 시켜서 했다는 말을 허라는 거여. 그래서 우리는 그거시 아니다, 누가 시켜서 헌 것도 아니고 도움 받지도 않았다, 내 새끼 구할라고 한 거다라고 했고."

결국 풀려났지만 죽도록 맞은 장씨는 부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나중에 5·18 유공자가 됐다.

장씨는 이후 40여년을 오월을 위해 살았다. 아들은 몇 년 뒤 가석방됐지만 다리를 절고 손을 떠는 등 여러 후유증에 시달렸다.

1990년 정부는 5·18 피해자를 '민주유공자'로 지정하며 일시 보상금을 지급했다. 당시 아들 박철씨는 장애 7급에 8000만원을, 장씨는 14급에 3500만원을 받았다.

'인생'을 통째로 잃어버린 모자에 대한 보상금치고는 너무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올해 환갑을 맞은 아들은 아직도 술을 마시고 울면서 전화해 "엄마, 나 아파 죽겠어"라며 고통을 호소한다고 했다.

장삼남씨가 집에 붙어있는 오월어머니회 활동 사진들 중 하나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장씨는 "이중 대부분은 이미 자식이나 남편 따라 죽었고, 남은 건 몇 되지 않는다. 친했던 사람들도 다 하늘에 갔다"며 회원들과 얽힌 사연을 털어놨다. 2022.9.4/뉴스1

"다른 사람들은 우리덜 보고 매달 연금이 얼마썩 나오냐고 한디 그런 거 없어. 그때 그거 주고 끝이여. 유공자라고 해봐야 교통카드 한나 주는거 말고는 한나도 없어."

아들의 석방을 위해, 명예 회복을 위해 오월어머니회 활동을 했던 그가 여전히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하나다. 이제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얘기하고 싶어서다.

"나쁜 놈들이 우리 5·18을 북한군, 폭도들에 의한 난동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분해 죽겄어. 나는 엄마잖어. 어찌 내 아들을 그렇게 만드는 걸 가만히 둬? 전두환 그놈은 사죄 한마디 없이 죽었는디 난 여전히 그날에 살아…. 나 어미 노릇 한번만 제대로 하게 사과받었으믄 좋컸는디. 인자 누구한테 사죄를 받어야쓰까."

breath@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