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눈 잃었어도 당당하게 인정받고 살고 싶어요"

[5·18 정신적 손해배상㊲] 곤봉 맞고 한쪽 눈 잃은 조국진씨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5·18 피해자 조국진씨(73)가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80년 5월 조씨는 계엄군에게 곤봉으로 폭행 당해 한쪽 눈을 잃는 장애를 입었다. 2022.8.27/뉴스1

(광주=뉴스1) 박준배 이수민 기자 = "메칠 전에 머리를 짤렀는디…."

"나가 예전에는 광주상고 학생회장도 혔고…."

"무안 낙지는 묵어봤소? 그거시 마싰는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잡다한 얘기들이 이어졌다. 최근 이발을 했다는 얘기부터 학창 시절, 광주와 전남 곳곳에 있는 단골식당 얘기까지 20분 넘게 끊이지 않았다.

광주 동구 대의동의 한 주류회사 직판장에서 근무하는 조국진씨(73).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피해자이지만 '5월' 얘기는 한 조각도 나오지 않았다. 말하는 사이 기자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았다.

취재진은 일부러 시계를 힐끗힐끗 쳐다보거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인터뷰를 하자는 시그널이었다. 애써 외면하던 조씨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기자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휴~, 선생님, 딱 하나, 이걸 알아줬으면 해요. 우리가 그때 얘길 할라치면… 우리는 또 기억을 하게 돼요. 잊어불고 있던 것을, 잊어불라고 그라고 했던 것을 다시 기억하게 돼요."

가슴이 먹먹한 듯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5·18, 그거시 한 번 기억해불믄 회복하고 극복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해요."

'5·18' 단어가 처음 나왔다. 금세 조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직 80년 5월 얘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입가에 침이 고이도록 말 많던 그가 '5·18' 한마디에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아차' 싶었다. 5·18, 일반인에겐 42년 전 발생한 민주화운동이지만 누군가에겐 깊은 상처이자 얘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눈물이었다.

그제야 조씨의 오른쪽과 왼쪽 눈이 조금 다르다는 게 보였다. 오른쪽 눈이 의안(義眼)이다. 의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1980년 5월, 서른한 살이던 조씨는 금남로5가에서 '국일광고사'라는 인쇄 회사를 운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에게 인쇄업 기술을 배운 덕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직원만 9명이었다.

5월18일, 평범한 일요일이었다. 당시 국일광고사는 '캘린더'와 '앨범' 제작을 주로 맡아서 했다. 그날도 앨범 제작 요청이 들어와 주말이지만 인쇄소를 나가봐야 했다.

오후 2시쯤 늦은 점심을 먹은 뒤 당시 전남도청 근처에 있던 동구 남동 인쇄촌으로 향했다. 지금의 인쇄 거리다.

국일광고사에는 사장인 조씨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이 몇 명 있었다. 과거 인쇄소를 운영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이었다.

그날도 70대인 직원 2명이 단가를 낮춰 제작이 가능한 인쇄소를 소개해주겠다고 해 조씨와 동행했다.

금남로에선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군인들은 시민들과 뒤엉켜 곤봉을 휘둘렀다. 뿌연 최루가스는 눈을 찔렀다.

금남로 큰길로 이동하긴 어려웠다. 동네 토박이인 직원들도 골목으로 가자고 말을 보탰다. 지금은 사라진 금남로 4가 광주중앙교회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때 계엄군 7~8명이 골목길로 따라 들어오더니 조씨 일행에게 멈추라고 했다.

"'니들 거기 서' 함시로 쫓아온디, 군인들이 시민들을 막 패는 것을 우리가 봤잖아요. 근디 우찌 서겄어요, 우리도 팰 것이 뻔한디…. 막 뛰어서 도망갔죠."

젊은 조씨가 선두에 섰고 직원들이 뒤따랐다. 그런데 직원 한 명이 도망치다 넘어졌다.

뒤따라온 계엄군 7~8명이 조씨와 직원에게 곤봉을 휘둘렀다. 조씨는 나이 많은 직원들에게 도망치라고 하고 계엄군에게 대들었다.

"나이 칠십잉께, 아부지 뻘인디 그걸 두고 어띃게 도망간다요. 바로 뒤돌아서 그분을 챙길라고 막 '인나소, 인나소' 했는디 계엄군한테 잡힌 거죠. 그땐 젊응께 내가 싸울 수 있을 줄 알았죠."

조씨는 "당신들이 뭔데 우리를 잡냐", "우린 인쇄소 가는 길이었다"고 항변했지만 군인들은 그를 발로 차고 폭행했다.

조국진씨가 당시 계엄군과 마주쳤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2022.8.27/뉴스1

계엄군 한 명이 조씨 얼굴을 향해 곤봉을 휘둘렀다.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렀다. '가지'처럼 진한 보라색의 피였다.

"손에 따악 피가 묻은디 음청 진한 거여요. 그걸 보고 인자 내가 악에 받쳐붕께 들이받아서 이판사판 싸우고…. 그러다가 기절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5월21일 전남대병원이었다. 길에 피 흘리고 쓰러져있는 조씨를 누군가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42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누가 옮겼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오른쪽 눈과 머리에 대각선으로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양쪽 다리에는 부목이 덧대고 있었다.

"'에이씨, 왜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게 요런 걸 감아놨다냐' 하고 딱 붕대를 풀었는디 실명이 돼 있었어요. 와따, 돌아불것습디다."

계엄군에게 폭행당한 조씨는 시각 장애 5급, 지체 장애 5급의 후천적 장애인이 됐다.

양쪽 다리는 흉터가 심하지만 기능적인 면은 다행히 많이 회복돼 절뚝거리면서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른쪽 눈의 시력은 영영 돌아오지 않아 의안(인공 눈알)을 맞춰 생활해야 했다.

의기소침해지고 자신감이 떨어졌다. 과거 돈 많고 성공한 사업가 조국진은 세상에 없었다. 매일 술과 약에 의지하며 억지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술을 한잔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지만 서너 잔부턴 슬픔이 몰려왔다. 어디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별것도 아닌 일에도 화가 나 길에서 모르는 사람과 싸우기 일쑤였다.

직장에 나갈 수도 없었다. 손수 일궜던 국일광고사를 팔고 아버지가 하는 일을 쫓아가며 여러 방면으로 도왔다.

1982년, 아버지 심부름을 위해 버스터미널 앞(현 롯데백화점 광주점)을 지나는데 한 노인이 무거운 짐을 들고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제 몸 하나 성치 않은 조씨였지만 몸이 아프기 때문에 노인의 마음을 더욱 이해할 수 있었다. 노인의 짐을 들어줬다. 노인은 조씨에게 고맙다며 자신의 조카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 선을 보기 위해 시내에 있는 한 다방에 갔다. 다방은 지하 1층에 있었다. 약속 시간에 늦은 조씨는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 모르는 사람과 부딪혔다.

잠시 뒤 소개받은 여성을 만나려고 자리에 앉았다. 조씨의 얼굴을 본 여자가 "으악!" 소리를 지르며 기겁하고 뛰쳐나갔다.

"화장실로 가 거울을 봉께 모르는 사람과 부딪침시로 의안이 돌아가 '흰 눈알'만 보이는 상태드라고요. 지금이야 기술이 발전해 의안이 돌아가는 일은 없지만 그때는 그런 일도 있었죠."

1990년, 국가에서 5·18 피해자들에게 일시적 보상금을 지급했다. 조씨는 정부에서 정한 기준에 따라 장애 7급으로 1억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보상금과 아버지 일을 도우며 모은 돈을 합치니 꽤 금액이 컸다. 그즈음 국일광고사를 할 때 알았던 사업가들에게 연락이 왔다.

사업가들은 "네가 돈을 벌기가 어려우니 투자를 해라. 보증을 서주면 돈을 불려주겠다"고 했다.

언제까지 아버지께 폐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한 조씨는 모은 돈을 전부 투자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건 '어음 사기'였다.

두 번의 사건으로 조씨는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됐다.

"그때 얼마나 상처를 받았게요. 물론 그 여성분도 놀랐을테니 미안한디…. 나는 막 괴물이 된 것 같았어요. 사기를 당하고 나서도 '아따 내가 만만해졌구마'하고 자책했죠. 그때부터 그냥 평생 혼자 살자 했어요. 마음에 담이 생긴 거죠."

아내도 자식도 없이 평생을 혼자 살았다. 지금도 북구 두암동에서 홀로 지낸다.

낮에는 동구 대의동에 있는 한 주류 직매점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광주시가 운영하는 트라우마센터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요가를 하며 마음을 달랜다.

주말에는 교회에 나간다. 기도를 하면 조금 마음이 나아진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장애를 보며 손가락질하거나 무시하는 것도 '용서'하고 '이해'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씨는 마음속에 남아있는 트라우마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함께 트라우마센터에서 치료받던 5·18 동지 중 한 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버텨오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때 자신도 따라서 삶의 이유를 잃을 뻔했다고 했다.

의안에 고인 눈물을 휴지로 닦아내던 조씨는 어느새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참말로 가혹하죠. 직접 피해 당사자인 우리가 고통을 꺼내서 진실을 계속 증언해야 한다는 것이요. 그렇게 맨날 폭도다, 간첩이다 명예를 실추시킨디 우째 삽니까? 그래도 계속 믿어달라고 말하는 이유는요….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예요. 나는 눈을 잃었어도, 당당하게 살고 싶어요. 명예 회복하고 인정받고 살고 싶어요."

breath@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