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 크라운 3333호차…내 운명 바꿨지만 후회 없어"
[5·18 정신적 손해배상⑩] 헌혈 독려 차량 시위대 홍창남씨
전남도경 국장 차량으로 헌혈·가두시위…주동자로 잡혀 고문
-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광주=뉴스1) 박준배 이수민 기자 = "아직도 기억나. 일본제야. 도요타 크라운 차량, 번호가 3333호. 그 차만 아니었어도 내 운명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여…."
7일 오후 4시쯤 광주 서구의 한 종합병원. 환자복을 입은 홍창남씨(62)는 깊은 회한에 잠긴 듯 창밖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병원 1층 로비에서 취재진을 만날 때만 해도 고갯짓으로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던 그였다.
올해로 8년째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홍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그와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외부인의 병원 출입 절차가 까다로웠고 인터뷰 시간도 한정됐다. 인터뷰를 위해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홍씨는 익숙하게 휠체어 두 바퀴를 굴리며 담당 원장은 물론 간호사, 수납처 직원, 주차 요원까지도 친근하게 안부를 물었다.
홍씨는 "가족 같은 사람들이 많다. 병원에 있으니 그나마 살아있는 것 같다"고 했다.
병원의 가장 높은 층 입원실로 이동했다. 창밖 너머로 높이 솟은 나무숲이 펼쳐졌다. 홍씨가 40여 년 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려던 찰나, 그는 창밖을 주시하더니 갑자기 숨을 헐떡였다.
"자, 잠깐만, 죽을 거 같어. 저, 저짝은… 잘 안 볼라고 노력하는디. 후~, 휴~"
홍씨가 심호흡을 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서구 화정동 쪽. 약 800여m 거리에 505보안부대 옛터가 있는 곳이다. 505보안부대는 40여년이 지났지만 누군가에겐 여전히 숨 막히는 곳인 듯했다.
1980년 5월 홍씨는 건축일을 하는 평범한 21살 청년이었다. 몇 달 뒤 입대를 앞두고 돈을 벌기 위해 벽돌 쌓기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5월18일 오후 동구 학동 홍씨의 집, 비명소리가 몇십 분째 이어지고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창밖을 보니 웬 군인들이 고등학생들과 제 또래 청년들을 무자비하게 패고 있었다. 홍씨는 너무 놀라 집 안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그날 밤, 파출소 앞에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한 어르신이 나와서 얘길 하는디 군인들이 정권 잡을라고 시민들 입 막고 폭행하는 거라고. 같이 데모해야 한다고 하드라고. 그땐 젊은 나잉께 나서야 쓰겄다 싶어 나선 거제."
홍씨는 동네 사람들 대여섯 명과 함께 충장로 입구와 시내를 돌아다니며 곳곳에서 이른바 '데모'를 했다.
거리 곳곳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시민이 폭행당해 쓰러졌고 총에 맞은 부상자도 넘쳐났다.
홍씨는 몇몇 일행들과 헌혈을 하고 부상자를 병원으로 옮겼다. 한명두명 업거나 손수레에 실어 병원으로 날랐다.
나중에는 부상자가 너무 많아 손수레로 옮기기엔 한계가 있었다. 홍씨는 자동차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9일 오전 전남도청 뒤편 전남경찰청 인근에 자동차 키가 꽂힌 일본산 신형 도요타 크라운 차량이 홍씨의 눈에 띄었다. 차량번호는 3333번. 홍씨는 급한 마음에 곧장 차량을 운전했다. 금남로 곳곳을 돌며 부상자를 옮기기 시작했다. 피를 흘린 사람을 보면 차에 태워 병원으로 실어날랐다.
차에 실은 사람이 없을 땐 창문을 열고 "병원으로 가 헌혈하세요!",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홍씨와 일행들이 구호를 외치고 부상자를 옮길 때면 거리의 많은 시민들이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 홍씨는 더욱 힘이 났다.
그렇게 이틀을 꼬박 차량 시위대로 활동했다. 이튿날 저녁 한 중년 남성이 홍씨에게 "그 차가 누구 찬 줄은 알고 타고 다니냐"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는 "전남 경찰 국장 차다. 차를 훔친 걸 들키면 너희는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땐, 경찰 국장 차라고는 생각도 못혔제, 아따. 급항께 차를 쓴 거제, 절도범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거제. 생각해 보쑈. 어뜬 놈이 미쳤다고 경찰 국장차를 훔치겄소."
겁이 난 홍씨와 일행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경찰에 붙잡힐까 두려웠다. 이들은 차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파손하고 광주천 학강교 밑에 밀어버렸다.
그날 이후로도 시위는 계속됐다. 21일도 홍씨는 광주 충장로 부근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때 한 계엄군이 홍씨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홍씨는 거칠게 저항했고, 계엄군은 대검으로 그의 가슴을 예닐곱 차례 찔렀다.
계엄군도 초보였는지 대검은 다행히 가슴뼈를 뚫지는 못했다. 쓰러진 홍씨를 시민들이 병원으로 옮겼고 며칠간 입원 후 퇴원했다.
병원 신세를 마치고 돌아오자 광주항쟁은 피로 물든 채 끝나 있었다. 홍씨도 상처를 안은 채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보름쯤 지났을까. 6월5일, 갑자기 경찰이 홍씨의 집 안에 들이닥쳤다. 당시 경찰 국장의 차를 훔쳐 타고 총을 소지했다는 고발을 접수하고 주동자를 찾는다고 했다.
경찰들은 총기를 찾겠다며 천장을 부수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자수하라고 윽박도 질렀다. 하지만 총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차량을 훔쳤다는 증거도 나오지 않아 경찰들은 그대로 돌아가야 했다.
한바탕 난리가 일고 난 뒤 부모는 홍씨에게 자수를 권유했다. 어머니는 군인도 아니고 경찰이 찾아온 것이니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며 하루라도 빨리 죄를 고백해야 감형이 될 것이라고 울먹였다.
홍씨 역시 가족들이 겪을 고통이 걱정돼 자수를 결심하고 경찰서로 향했다.
전라남도경찰청에 들어간 이후로는 고통의 시간이 계속됐다. 홍씨는 차를 훔친 데다가 '전두환'의 이름을 입 밖에 내고 시위를 했다며 내란의 주동자로 몰렸다.
조사실에 끌려가 전신에 무자비한 폭행과 구타, 고문을 받았다. 며칠 뒤 505보안부대를 거쳐 상무대 영창으로 이송됐다.
1980년 9월1일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날, 홍씨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아이러니였다. 학살자는 대통령이 됐으나 홍씨의 불행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내 인생이 끝난 날이나 마찬가지였제. 간첩으로 몰리고 서럽고. 안겪어본 사람덜은 몰러. 정작 벌 받을 놈은 그놈인데, 그날 그놈은 시작이었고 나는 미치기 시작한 거지."
경찰들의 감시가 시작됐다. 어디를 가도 통장에게 보고를 해야 했고 누군가를 만나면 갑자기 경찰이 찾아와 "어떤 관계냐"고 캐물었다. 친구를 새로 사귀어도, 여자를 만나도 금방 관계가 깨지곤 했다.
홍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기가 생겼다고 한다. 더욱 신군부에 대항하겠다는 마음이 커졌다.
"이런 생각까지 들더라고. 이왕 망쳐분 인생, 민주투사로 한 몸을 바쳐불자…. 후회없이 싸워불자."
12인승 그레이스 차량을 구매해 서울로 데모하러 다녔다. 홍씨의 차량번호는 금세 경찰들 사이에서 퍼졌다. 홍씨의 차량이 서울에 떴다 하면 경찰차가 앞뒤 양옆으로 4대씩 따라붙었다.
1995년 7월18일 전두환에게 공소권이 없어 불기소하겠다는 판결이 났던 그날도 홍씨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그놈의 집 앞'에 있었다.
차는 부서지고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다쳤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홍씨는 "이미 심장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
홍씨가 부딪히고 깨지면서도 계속해서 싸울 수 있었던 건 부양할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5·18 피해자임을 숨기고 결혼했다가 그 사실이 알려진 뒤 아내와 별거했다.
"그때까정만 해도 광주 오월은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안 좋았제. 폭도, 역적, 간첩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응께. 아내는 애국이 뭣이 중요하냐며 피해 보는 것만 있응께 데모 그만하라고 했거든."
동네에서 술을 먹다가도 옆 테이블 사람들과 자주 싸웠다. 누가 쳐다보기만 해도 "왜 보냐"며 따졌고 경찰의 요시찰로 의심하다 보니 싸움이 잦았다.
싸움이 나 경찰서에 가면 경찰들도 무조건 상대편을 들었다. 홍씨는 그게 서러웠다고 했다.
"폭도 새끼, 이 나쁜 놈의 새끼라는 말을 맨나 듣고 살았제. 그랄 때는 샛바닥(혀) 깨물고 죽고 싶었제. 그런 일이 반복되다 봉께 늘 내가 죄인된 것 같은 생각만 들고. 나중에 누가 글더라고. 그거시 트라우마라고."
지난 사연을 한창 털어놓던 홍씨가 웃옷을 걷어올리더니 가슴팍에 난 대검으로 생긴 흉터를 보여줬다.
"그날 이후로 삶이 바뀐 거지. 5·18 아니었으믄, 나도 군대도 가고, 그냥 평범하게 살었을건디… 그래도 후회는 없어, 그놈의 오월이 나를 민주투사로 만든 거여."
홍씨의 마지막 소원은 아내와 별거 후 자연스레 헤어지게 된 자녀들에게 용돈 한 번 보내주는 것이라고 했다.
젊은 날에야 부양할 가족이 없어 사방팔방 뛰어다녔지만 몸이 아프고 나니 가족이 종종 떠오른다고 했다. 오늘내일하는 자신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리면 어쩌냐는 불안감도 있다.
"몇백만원이라도 보태주고 싶지. 내 트라우마는 문제가 아녀. 애기들한테 애비 없는 설움을, 이 트라우마를 물려주고 싶지 않은 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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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