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범죄 될 뻔한 '권총강도'…사건해결 결정적 '세 장면'

공소시효 폐지·과학수사 기법 발전·형사의 집념이 결실 맺어
대전 국민은행 강도살인범 체포…국내 장기 미제 사건 279건도 해결 기대

21년 전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 살인 사건을 수사 중인 대전경찰이 30일 수사 상황을 공개한다. 30일 대전경찰청 과학수사계 입구에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2022.8.30/뉴스1 ⓒ News1 김기태 기자

(대전=뉴스1) 이시우 기자 = 또 하나의 장기 미제 사건이 해결됐다. 은행 직원 1명의 생명과 현금 3억 원을 빼앗고 21년 동안 자취를 감췄던 범인들의 얼굴이 공개됐다.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의 기록에서 사라졌던 퍼즐 조각을 찾는데 7553일이 걸린 셈이다. 월드컵 개막을 6개월 여 앞두고 발생한 총기 사건에 경찰은 신속한 해결을 기대했지만 월드컵이 끝나도록 별다른 단서 하나 찾지 못했다. 결국 공소시효 만료로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 사건으로 남을 뻔 했다. 하지만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극적인 기회가 찾아오면서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게 됐다.

◇"끝까지 잡는다" 살인죄 공소시효의 폐지

2001년 12월 21일,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지하 주차장에서 울린 총성과 함께 범인은 사라졌다. 범인들은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경찰은 사건 발생 1년 3개월이 지나도록 범인의 윤곽조차 찾지 못하자 스스로 수사본부의 문을 닫았다. 수사는 계속됐지만 남는 것은 수사 기록 위에 쌓이는 먼지 뿐이었다. 미제 사건으로 분류돼 잊혀져 가던 사건은 2011년, 전국 각 경찰청에 '중요미제사건 전담 수사팀'을 설치되면서 잠깐 주목 받았지만 결과는 10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소시효 만료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공소시효 만료 1년 여를 앞둔 2015년 장기 미제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폐지되는 형사소송법이 개정됐다. 1999년 5월 20일 대구의 한 골목길에서 여섯 살 김태완군이 괴한이 뿌린 황산에 맞아 49일 만에 숨진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 범인이 끝내 잡히지 않은 채 공소시효가 만료되자 살인죄의 공소시효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2015년 형사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적용 대상을 '법 시행 이전에 발생한 범죄 중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범죄'로 정하면서 대전 은행강도 살인 사건도 포함됐다. 공소시효가 사라져 범인을 잡을 때까지 수사를 이어갈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대전 경찰은 2017년 미제사건 전담팀의 인력을 보강하며 증거와 수사기록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진화하는 과학수사

미제사건 전담팀은 대전 둔산경찰서에 보관 중이던 관련 증거를 대전경찰청으로 이관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6년이 지나 현장에서 확보한 증거와 수사 기록을 다시 살펴보는 수 밖에 없었다. 범행 현장에서 수집된 마스크가 형사의 눈에 띄었다. 수사 초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했지만 유전자 정보를 얻지 못했다. 경찰은 별다른 기대없이 마스크에 대한 유전자 분석을 재차 의뢰했다.

유전자 분석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있었다. 1ng(나노그램, 10억 분의 1g)의 세포에서도 유전자 정보를 찾아냈다. 마스크에서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성의 유전자 정보가 확인됐다. 경찰은 함께 수거한 손수건에 대해서도 분석을 의뢰했고 마스크에서 발견된 인물과 동일하다는 답변을 얻었다.

백기동 형사과장이 30일 오후 대전경찰청에서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미제사건 피의자 검거 관련 수사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2022.8.30/뉴스1 ⓒ News1 김기태 기자

마침 범죄현장에서 확보한 유전자 정보를 저장하는 데이터베이스에 동일 유전자가 확인됐다. 충북의 한 불법 게임장에서 수집한 담배꽁초에서 나온 것이었다. 은행강도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불법 게임장에 나타났다는 뜻이다. 사건 발생 16년 만에 범인의 흔적이 처음 확인된 순간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형사다"

유전자 정보는 확보했지만 유전자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경찰은 유전자의 주인을 찾기 위해 불법 게임장에 다녀간 모든 사람을 확인하기로 했다. 1만 5000여 명이 추려졌다. 이들에 대한 유전자 정보가 등록돼 있다면 범인 검거는 훨씬 앞당겨졌겠지만 범죄인 유전자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는 정보는 살인 등 11가지 범죄를 저지른 구속 피의자와 수형자들의 것이다. 경찰은 1만 5000명에 대해 한명씩 범행 연관성 여부를 확인하기로 했다. 최소 5년이 걸릴 일이었다.

당시 미제사건 전담팀을 지휘하던 김선영 대전청 강력계장은 "팀원들과 최소 5년은 잡고 가자. 우리가 못하면 우리 자식을 경찰 시켜서라도 하자는 결의를 다졌다"라고 회상했다.

범인을 반드시 잡겠다는 집념 때문이었을까. 경찰은 당초 예상 보다 빠른 지난 3월, 유전자의 주인이 이정학(51)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21년 만에 윤곽을 드러낸 것이다. 경찰은 이정학의 과거 행적과 주변인을 조사해 용의자로 특정, 지난 25일 체포했다. 이씨는 범행을 시인하고 공범으로 고등학교 동창인 이승만(52)을 지목했다.

백기동 대전경찰청 형사과장은 이번 사건에 대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사건"이라며 "공소시효 폐지와 과학수사 기법의 발전, 미제사건 전담 수사팀 운영과 형사들의 끈질긴 집념으로 미궁에 빠졌던 사건을 해결한 쾌거"라고 자평했다.

한편,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2011년 전국 17개 시·도 경찰청에 중요미제사건 전담 수사팀이 설치된 이후 78명의 경찰관이 미제로 남아 있던 주요 강력사건 60건을 해결하고 88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여전히 공소시효 적용이 배제된 장기 미제사건 279건을 수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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