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농약중독치료 권위자 홍세용 순천향대병원 교수

내년 정년…"3~5년 연구활동 보장되면 계속 남고 싶어"
"농약중독 치료는 내 운명…자살기도자 쉼터 만들고파"

홍세용 순천향대학교 천안병원 신장내과 교수.© News1

</figure>‘남느냐 떠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농약중독 관련 세계적인 권위자인 홍세용 순천향대학교 천안병원 신장내과 교수(65·사진)가 딜레마에 빠졌다.

정년이 내년 2월로 다가온 가운데 바쁜 병원생활을 계속하느냐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다소의 여유로움 속에 개인활동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정년 퇴임을 맞을 거라면 지금쯤 하던 연구를 정리하기 시작하고 동료 의사에게 단골 환자의 병력을 인수인계해야 할 때이지만, 아직 진로에 관해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다.

올 들어 전국적으로 교육감 연루 인사비리가 연이어 터진 가운데 2월 김종성 충남도교육감의 음독시도로 또 한 번 유명세를 치른 홍 교수를 2일 천안순천향대병원 교육관 교수실에서 만나 앞으로의 거취문제와 정년을 앞둔 소회를 들어봤다.

◇“단기 연장 근무는 어려워”

홍 교수는 거취에 관해 “고맙게도 (순천향대)학교에서 언질을 줬지만, 구체적인 것은 아니다”고 운을 뗐다.

홍 교수는 하는 일의 특성상 단기계약으로 교수직을 연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다.

1984년부터 천안순천향대병원에서 재직해와 올해로 30년째다. 교수 자리보다 연구의 연속성을 보장받는 게 더 중요하단 얘기다.

홍 교수는 “학교에서 남아달라고 제안해 준 것은 고맙지만, 우선 1년 한 뒤 다시 1년 더 하는 식은 곤란하다”며 “3년이나 5년 등 일정 기간을 보장해줘야 그에 맞춰 일(연구) 할 수 있다”고 밝혔다.

홍 교수는 “지금쯤이면 하던 일을 정리해야 할 때지만, 아직 않고 있다”며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발로일지 모르지만, 떠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홍 교수가 떠날 수 있다는 여지를 두는 것은 학교 측과 밀당(밀고 당기기)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학교에 남는 것을 ‘독배’에 비유했다.

홍 교수는 “(남는다면) 논문을 분기에 1편씩 내야 한다”며 “내 경우 국제논문채택률이 3할 정도로, 논문이 채택되지 않으면 보름쯤은 입맛도 잃을 만큼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다”고 부연했다.

홍 교수의 노년 인생관도 그의 잔류 고민을 가중시키고 있다.

홍 교수는 “추하게 늙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노욕을 부려 후배들 길을 막아선 절대 안 된다”며 “쇼트트랙 장거리 경기에 비유하자면 이제 나는 후배를 힘껏 밀어주고 옆으로 빠지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 시점이 언제이냐를 두고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노교수는 그 시점을 3~5년쯤 뒤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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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1

</figure>◇농약중독 농민…“내가 돌봐야 할 사람들”

홍 교수와 농약중독의 인연은 우연이 아닌 필연에 가깝다. 홍 교수도 농약에 중독된 농민을 “다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이라며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홍 교수는 전북 익산 고즈넉한 시골 마을의 정미소 집 아들이다. 시골에서 정미소, 양조장은 곧 부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정미소에 불이 났다. 당시 중학생이던 홍 교수에게 부모님은 학교 가지 말고 공장을 가라고 했다. 일시적인 게 아니라 집안에 끼니를 때울 양식이 없어 배를 곯아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홍 교수는 부모 눈을 피해 도망 다니며 학교에 갔고 어찌어찌해서 서울의 한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홍 교수는 “요즘 젊은이는 배고프다는 것을 잘 모른다”며 “전주에서 자취할 때 (집에서)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쌀과 반찬을 보내와야 하는데 오지 않아 굶어야만 했다”고 회상했다.

홍 교수는 “의대를 다닐 때도 학교 근처는 방값이 비싸 3시간 넘는 거리에 거처를 잡았다”며 “첫차를 타도 항상 지각을 달고 살았다”고 부연했다.

어렵게 학교에 다녔지만, 집안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홍 교수는 “공부를 잘해 장학금을 받지도 못했다”며 “부모님은 학자금 때문에 빚을 얻어 내 등록금을 내시다 돌아가셨다”고 말끝을 흐렸다.

졸업 후 홍 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천안순천향대병원에 왔다.

홍 교수는 “갈 데가 없어 내려왔지만, (농촌이) 나와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는 노동집약적으로 농사를 짓는데다 농약 치는 과수원에 집을 짓고 사는 등 생활여건이 농약에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어 중독 환자가 많았다”며 “문제는 이들에게 배운 걸 써먹어야 하는데 배운 게 없더라. 위세척하고 포도당 달아주는 게 전부였다”고 탄식했다.

홍 교수는 이런 농촌 현실을 직시했다. 문제를 외면하기보다 해결을 위해 몸부림쳤다.

홍 교수는 “나중엔 애칭이 됐지만, 병원에서조차 또라이(이상하고 유별난 놈)로 불렸다”며 “중독환자에게 추가진료를 했더니 건강보험공단에서 과잉진료라며 경고를 하길래 담당자에게 제1한강교 백사장으로 나오라고 결투를 신청했는데 알고 보니 그곳엔 백사장이 없더라”고 웃었다.

홍 교수가 신장을 전공한 것도 우연치고는 절묘하다.

홍 교수는 “혈액투석 등 몸속 독을 빼내는 기술은 신장내과의가 제일 잘한다”며 “독성학과 신장학은 입구는 다르지만, 출구는 같은 학문”이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누군가 내게 ‘농촌에 마음의 빚을 진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서울 대형병원에 일했다면 농약중독을 접하기 어려웠을 테니 내게 주어진 기회였고 무엇보다 내가 할 일이었다”면서 “다만 현장에서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좌충우돌했을 뿐”이라고 겸양을 부렸다.

하지만 이런 그의 좌충우돌 덕분에 그라목손 성분의 맹독성 제초제 패러쾃의 치료법이 개선되는 등 농약중독 치료의 새 장이 열렸다.

홍 교수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제3회 지산의약상, 2006년 대한민국 농업과학기술대전 농업과학기술상, 2011년 제3회 대한의사협회 의과학상 우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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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환자는 환자일 뿐…살린 자살시도자들 재회하고파”

최근 홍 교수는 김 교육감의 음독시도로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김 교육감 퇴원 일자를 조기에 밝혀 병원 내에서 뜻밖이라는 반응이 나왔던 것과 관련해 “환자는 환자일 뿐”이라며 “지위 고하를 떠나 (치료·퇴원은) 보통사람처럼 하자고 했다”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경찰은 소견을 계속 물어왔지만, 의사는 환자의 죄가 아니라 병을 본다. 일각에서 쇼라는 말도 나왔지만 쇼라면 한두 모금 마시지 그렇게 벌컥벌컥 안 마신다”면서 “환자 가족에게 ‘의연해라’, ‘고통스럽겠지만, 병원에 있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터널은 빨리 통과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고 밝혔다.

홍 교수는 앞으로도 자신이 할 일이 많다고 느끼고 있었다.

홍 교수는 “의료계도 농약중독을 잘 모른다”며 “농약 1병에는 계면활성제 등 수많은 첨가제가 들어간다. 첨가제 독성에 대해 밝혀내고 치료법을 개선하는 게 내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홍 교수는 “몇 년 전 조사에 따르면 농산물 중 유기농이 차지하는 비중이 유럽은 10%, 국내는 5%가 안 된다”며 “현실적으로 농약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만큼 연구에 더 매진하고 싶다”고 역설했다.

그의 마지막 꿈은 오갈 데 없어 농약으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쉼터를 만드는 것이다.

홍 교수는 “그동안 농약 자살시도자 1만여명 중 5000명쯤을 살렸다. 꿈같은 얘기지만 여건이 되면 그들이 어찌 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며 “특히 서해안 간척지를 분양받아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쉬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eruca@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