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만에 마침내...", 부산UN공원에 함께 묻힌 캐나다 참전용사 형제의 감동 사연(종합)

캐나다 판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동생 아치발드 허시 유해가 형의 묘에 함께 안치되기 전, 아들(맨 왼쪽)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figure>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생사가 엇갈렸던 캐나다 조지프 허시와 아치발드 허시 형제가 60년만인 25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함께 묻혔다.

국가보훈처는 25일 오후 3시10분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허시 형제에 대한 추모식을 갖고 동생 아치발드의 유해를 형 조지프 묘에 합장 안치했다.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유엔기념공원 유엔군전몰장병 추모명비 앞에서 열린 추모식은 진혼곡,영혼을 천국에 보내는 '꿈맞이 공연' 등 식전 행사에 이어 박승훈 보훈처장과 캐나다 대사의 추모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박 처장은 "한국정부는 허시 동생의 유언을 지켜 주기 위해 캐나다 본국에서 이장, 형과의 합장을 하게 됐다"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한국전에 참전한 캐나다의 두 형제를 대한민국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이어 주한 캐나다대사관과 유엔관리처 주관으로 진행된 합장안장식은 캐나다의 군인안장 의식에 따라 간소하게 진행됐다.

이날 추모식과 안장식엔 한국전쟁 당시 임진강,가평 방어작전을 폈던 영연방 4개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참전용사 100여명과 제3사관학교 생도 100여명이 참석했다.

허시 형제의 합장은 한국전쟁에 먼저 참여한 동생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뒤따라 참전했다가 전사한 형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이뤄졌다.이들 형제의 사연은 한국계인 연아 마틴(한국명 김연아) 캐나다 상원의원을 통해 국가보훈처에 알려졌다.

허시 형제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동생 아치발드는 21살 되던 1950년 9월 7일 한국전쟁 참전을 위해 입대했다.

형 조지프는 한 살 터울의 동생이 걱정돼 다니던 철도 회사를 그만두고 이듬해 1월 6일 입대해 한국 땅을 밟았다. 형은 동생이 있는 프린세스 패트리셔 경보병연대에 배치됐다. 형제는 같은 연대에 있었지만 계속되는 전장의 포화 속에서 만날 길이 없었다.

1951년 10월 13일 동생 아치발드는 전우들로부터 허시 성을 쓰는 병사가 쓰러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그곳에는 캐나다에 있어야 할 형이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형은 그토록 그리던 동생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치발드는 그제서야 형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형은 1951년 10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아치발드는 1955년 명예 제대를 했다.아내(아그네스)를 만나고 가정을 이뤘지만 형에 대한 미안함과 상처는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아치발드는 형의 묘지를 찾기 위해 한국에 오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참전용사에게 한국 방문 기회를 주는 유엔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이미 폐질환에 걸려 장거리 여행에 나설 수 없는 몸이었다.

그는 25년간 폐질환을 앓다가 2011년 6월 숨졌다. "한국에 있는 형 곁에 함께 있고 싶다"는 유언을 딸 데비에게 남겼다. 데비가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아버지 유해를 들고 한국에 왔다.

데비는 "아버지는 내가 성인이 된 뒤 한국전쟁 경험담을 들려주기 시작했다"며 "그때야 아버지의 손이 왜 항상 검푸른 피멍 투성이었는지 알게 됐다. '적에게 둘러싸인 형을 보호하려고 주먹질을 하는 꿈을 자주 꿨는데,깨어보면 침대 옆 탁자를 두드리고 있더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애틋한 형제애를 보인 이들의 유해가 60년만에 합장된 25일 부산유엔공원엔 봄비가 세차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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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1  남성봉 기자

</figure>25일 부산UN공원에서 열린 허시 형제의 추모식에 캐나다 등 영연방 참전용사들이 참여해 추모사를 듣고 있다. © News1

 

nam68@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