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조사서 5세기 대규모 토목공사 흔적 확인

대규모 패각 성토층, 가야 토목기술 엿볼 수 있어
신라·백제 절터 성토 방법과 차이…조성시기도 앞서

김해 봉황동 유적 전경.(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김해=뉴스1) 박민석 기자 =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조사에서 5세기대 금관가야의 대규모 토목공사 흔적이 확인됐다.

김해시와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는 24일 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현장에서 조사성과 설명회를 연다고 밝혔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금관가야의 왕궁 또는 왕성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봉황대 구릉을 중심으로 유적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여러차례 이뤄졌다. 그간의 조사에서 항구 창고터를 비롯해 야철터, 건물터, 조개무지, 환호, 토성, 지석묘 등 청동기 시대부터 금관가야에 이르는 유적이 확인됐다.

국립가야문화연구소는 봉황대 구릉 동편의 경사면과 평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패각 성토층을 확인해 그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세부조사를 진행해 왔다.

연구소 조사 결과 봉황대 구릉 북동편의 저지대는 다량의 조개를 섞어 경사지게 켜켜이 다져 쌓아 대지 조성 및 확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구조물은 가야 당시의 토목기술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같이 조개껍질을 쌓아 성토한 토목 기술은 지반을 강화하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여진다.

패각성토층은 최대 깊이가 4m로 길이는 주변 봉황토성 성벽까지 이어질 것을 고려하면 100m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성토 방법은 주로 넓은 대지를 조성할 때 이용된다. 경주 황룡사터와 부여 금강사터 등 삼국시대 절터에서 단편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연구소는 봉황동 유적 성토층이 이들 유적보다 조성 시기가 앞서고 조개 껍질을 섞어 사용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해 봉황동유적 서벽 토층.(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또 그간 봉황동 유적 성토층은 탐색 트렌치(Trench, 길쭉하게 판 홈)를 활용해 확인한 토층 단면으로 경사 성토 사실을 제한적으로 파악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밑지름 6~8m 내외, 높이 1m 내외의 둔덕을 쌓고 이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동심원 모양의 성토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평면 구조가 새롭게 밝혀졌다.

연구소는 과거 인근 도시개발 과정에서 일부 확인된 봉황토성의 토축 성벽 조사결과와 이번 조사결과를 종합하면 5세기대에 봉황대 구릉 전체를 둘러싸는 둘레 1.5㎞ 정도의 토축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대지 조성과 확장이 함께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번 발굴성과 공개 설명회에서는 가야의 토목기술뿐만 아니라 대형 주거지와 그간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된 중요 유물도 함께 공개한다. 대형주거지는 4세기대 조성된 것으로 추가 조사와 연구를 통해 내부 아궁이 시설과 주거지 벽체의 세부 구조를 새로 밝혔다.

출토 유물은 당시 왕성 내의 생활과 의례, 음식 문화, 생산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로 각종 생활 토기를 비롯해 사슴, 고래, 상어 등 각종 동물뼈와 복골, 모형토기, 토유 등 의례행위 관련 유물, 골각기 유물, 야철 작업 관련 유물 등이 공개될 예정이다.

시는 연구소와 협력해 봉황동 유적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자연과학적인 분석 연구 등을 통해 가야왕성의 실체를 밝힐 계획이다.

pms7100@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