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피카소' 故전혁림 대작, 부산시청서 찢긴 채 방치

"부산시 문화예술 수준 적나라하게 보여줘"
부산시 "이용객의 작품 접근 막고 있어"

부산시청 로비 왼쪽 벽면에 설치된 故 전혁림 화백의 '한국의 풍물'.2023.5.17. 윤일지 기자

(부산=뉴스1) 손연우 기자 =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한국의 피카소'로 알려진 고(故) 전혁림(1915-2010) 화백의 작품 '한국의 풍물'이 부산시청 로비에 찢기고 먼지가 쌓인 채 수십년째 방치되고 있다.

18일 부산시청 로비 왼쪽 벽면에 설치된 전 화백의 작품에는 군데군데 먼지가 뒤엉겨 있었다. 작품 아래 부산일자리종합센터가 들어서 있어 먼지를 걷어내는 등 관리할 수 있는 여건이 안돼 보였다. 작품은 3층 높이의 로비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의 규모(가로 20m·세로 10m)다.

로비 오른쪽 벽면에 설치돼 있는 작품(가로 10.8m·세로 12m)은 찢기고 여러 군데 더럽혀져 있었다. 오방색을 사용한 작품으로 색의 명확성이 중요하지만 작품 아랫부분이 상당히 변색돼 있었다. 시는 이 작품이 걸려있는 벽면을 포함 지난해 9월 부산 미래형 공공 놀이터이자 어린이 복합문화공간인 '들락날락'을 건립하고 내부에 도서관과 카페, 놀이기구 등을 설치했다. 작품과 맞닿아 있는 곳에는 무대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어린이 공연을 열고 있다.

시민들의 접근은 많아졌지만 작품 훼손을 막기 위한 대안은 작품 앞에 '작품에 손대지 말라'는 안내표지판이 전부였다.

부산시청 로비에 설치된 故 전혁림 화백의 '한국의 풍물'이 찢기고 훼손돼 있다.2023.5.17. 윤일지 기자

부산시는 1998년 안상영 시장 당시 청사를 현재 위치로 옮길 때 개청 기념으로 설치했다. 작품이 처음 설치될 때와 달리 청사 로비에 부대시설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현재는 전시 자체의 기능을 상실한 모습이다.

전 화백의 작품은 부산시청 외에도 청와대 인왕홀, 대법원 대회의실, 부산고등법원 회의실, 경남도청, 인천지방경찰청, 안양지방법원, 용인시청 등 총 7곳에 전시돼 있다. 이 중 작품이 부대시설의 뒷배경처럼 설치돼 있는 곳은 부산시청이 유일하다.

현장에서 만난 들락날락 관계자와 작품 담당 부서 관계자는 작품이 찢겨진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관계자는 "무대 뒤에 그림이 있어서 공연 때마다 사진찍으면 보기 좋다"고 말하는 등 작품의 가치와 보존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전 화백의 아들이자 전혁림미술관 소장인 전영근 화백에 따르면 전 화백은 부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으며, 이에 당시 제작비 수준의 비용(9980만원)만 받고 작품을 완성했다.

작품은 독일에서 공수한 총 28개(5m x 2.5m 16점, 2.7m x 4m 12점 )의 특수캔버스를 연결됐다. 전 화백의 작품 중 최대크기로, 설치 당시 시는 작품을 나눠(6점 2개, 16점 1개) 시청 로비 양쪽에 설치했다.

전혁림 화백의 작품 '한국의 풍물'에 먼지가 쌓여있다.2023.5.17. 윤일지 기자

미술계에서는 "한국의 풍물은 다시없을 역작이다. 작가가 부산시에 헌사하기 위해 마음먹고 만든 작품이다. 이런 초대형 작품은 다시 작업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김이완 이영미술관 관장은 "한국의 풍물은 가치와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의 한국회화사상 최고의 작품이다. 전 화백의 작품이 방치돼 있는 곳은 단 한곳도 없다. 부산시의 문화예술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행위다"고 비판했다.

전영근 화백은 "선친이 부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심혈을 기울여 기증한 작품이다. 시에서 잘 보존해 후대에 넘기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들락날락 관계자는 "작품이 너무 커서 들락날락을 건립할 당시 작품을 옮기려는 고민은 있었지만 훼손 가능성으로 당시 존치 결정을 내렸다. 작품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방문객에게 작품에 손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산시 관계자는 "작품보존 방안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작품 아래 들어서 있는 부산일자리종합센터는 조만간 다른 곳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들락날락 안에 있는 작품은 어르신 도우미를 배치해 이용객의 접근을 막고 있다"고 밝혔다.

전 화백에게는 고향인 통영과 부산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작품 활동을 하며 '한국의 피카소', 한국 추상화의 비조, 색채의 마술사, 바다의 화가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어있다.

통영 출신인 전 화백은 한국적 색면 추상의 선구자로 독자적 영역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회화뿐만 아니라 도자, 목조, 입체회화, 도자회화 등 광범위한 장르를 두루 개척했던 전혁림은 3000여 점의 작품과 전혁림미술관(경남 통영)을 남기고 2010년 5월 향년 96세로 영면했다.

부산시청 로비 오른쪽 들락날락 내 설치된 故 전혁림 화백의 '한국의 풍물'.2023.5.17. 윤일지 기자

syw5345@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