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 초록빛 향연 백담 지나 봉정암…사리탑이 '설악걸작'
설악산국립공원③ 백담계곡~봉정암 17.6㎞…시상(詩想) 떠오르는 가을 길
용이 휘감는 듯 쌍룡폭포…하늘 향해 솟구친 용아장성의 바위제국 '감탄'
- 신용석 기자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설악산(雪嶽山)은 ‘하얀 산’이다. 하얀 눈이 가을부터 봄까지 쌓여 있어서, 또는 솟아오른 바위봉우리들이 눈처럼 하얘서 설악산이다. 그런 설악산의 ‘하얀’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계곡이 백담계곡이다.
백담(百潭)은 백 개의 ‘큰 물웅덩이(潭)’가 있을 정도로 수려하다는 뜻이다. 이 계곡에 길게 이어진 암반과 바위의 대부분은 눈처럼 밝은 하얀색이다. 금방 하얀 페인트를 칠한 듯한, 금방 세탁소에서 찾아온 와이셔츠 같은 흰색이다. 그런 우윳빛 암반과 바위들이 굽이굽이 계곡에 쭈욱 조각되어 있고, 거기에 담긴 물이 초록빛으로 반사되는 ‘흰색과 옥색의 어울림’, 가을에 ‘하얀 바위와 빨간 단풍의 대비’는 정말 그림이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7㎞는 원래 “길이 좁고 위태로워 송아지를 안고 들아갔다”고 옛 문헌에 쓰여있다. 기자가 35년 전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소형차 한 대가 간신히 다닐 정도였고, 큰비가 내리면 교량이 떠내려가 몇 달씩 차량통행이 안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 한 분이 백담사에 칩거할 때 길을 크게 정비해, 이제는 셔틀버스가 바쁘게 왕래하는 도로가 되어 버렸다. 수려한 계곡의 한쪽에 도로가 들어선 것은 설악산에게 미안한 일이다.
◇ 용대리~백담사~영시암 10.5㎞ “하얀 바위, 초록물 즐기며 한용운의 시를 읊다”
동서울터미널에서 6시 49분에 출발한 첫 버스로 용대리에 내리니 9시다. 마을의 중앙통로는 마가목 가로수의 빨간 열매와 버들마편초의 보랏빛 꽃 무더기, 코스모스 물결로 가을분위기가 가득하다. 용대리는 전국에서 황태해장국을 가장 잘 끓여내는 마을이다. 뽀얀 국물이 일년을 우려낸 사골국물처럼 진하고 구수하다.
셔틀버스가 있지만, 백담계곡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서 걷는 편을 택한다. 계곡으로 들어가는 첫 교량에 ‘금교’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백담사까지 세 개의 교량이 더 있는데 수교, 강교, 원교다. 즉 ‘금수강원(錦繡江原)’이다. 금교 아래의 널찍하고 울퉁불퉁한 암반 사이로 가득 흐르는 초록물부터 백담계곡은 남다르다.
길은 계곡에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다리를 건너며 꼬불꼬불 순하게 이어진다. 투명한 계곡물이 하얀 암반에 담겨 초록색으로 반사되거나,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풍경을 즐기며 걷는다. 물소리와 새소리, 시원한 그늘길, 숲 냄새, 숲틈으로 들어오는 햇살로 생기가 가득한 아침 길이다.
좁은 도로에 계곡쪽으로 데크 보도를 달아내는 작업이 한창이다. 사람의 안전을 위한 시설이긴 하지만, 이렇게 계곡을 차단하는 난간이 길게 이어지면, 계곡으로 물 먹으러 가는 동물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생긴다.
출발한 지 두 시간이 못되어 백담사 경내로 들어선다. 셔틀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에겐 쉽게 들어온 절이지만, 걸어온 사람들에겐 산속의 깊은 절이다. 대청봉에서부터 100번째 물웅덩이(담/潭)가 있는 지점에 세워 백담사라 부른다.
백담사에는 바다(海)를 호(號)로 쓴 두 분의 발자취가 있다. 한 분은 만해(萬海) 한용운 선생이고, 한 분은 일해(日海)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같은 공간에서 두 분의 이미지는 너무 다르다. 본래의 백담사는 고즈넉한 작은 절이었는데, 전직 대통령이 다녀간 후 일종의 관광지가 되어 큰 절이 되었다. 잘된 것인지 아닌지 평가는 사람마다 다른데, 절 안에 있는 한용운 선생의 흉상은 “이건 아니지 않는가!”라는 표정이다.
백담사 출구의 개울에는 돌탑들이 수두룩하다. 상류에서 흘러내린 주먹 크기, 벽돌 크기의 돌맹이들을 쌓아올린 수백 개의 소망탑이다. 큰비가 내리면 우루루 무너지고, 다시 뚝딱 세워질 돌탑들이다.
‘돌탑 개울’을 건너, 자연관찰로를 통해 조금 우회해서 가는 길을 간다. 오래된 숲을 그냥 쓰윽 지나가지 말고, 잠시 멈춰서서 자연과 교감하는 것이 좋다. 가래나무, 찰피나무, 다릅나무 등의 흔치않은 나무이름표 앞에서 그 줄기를 한번 쓰다듬으면, 깊은 자연이 내게 전달되는 촉감을 느낀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를 백담계곡, 여기서 수렴동대피소까지를 수렴동계곡, 여기서 봉정암까지를 구곡담계곡으로 구분한다. 계곡 전체를 백담계곡으로 부르기도 한다. 내설악의 수백 개 물줄기는 모두 백담계곡으로 모인다.
수렴동(水簾洞)은 ‘물이 꿰어져 있는 계곡’이라는 뜻이다. 내내 옥빛 물웅덩이와 작은 폭포들이 주렁주렁 이어지면서, 하얀 물보라가 튀고 조약돌이 반짝인다. 이 계곡과 함께 가는 길은 등산로라기보다는 호젓한 산책로, 오솔길이다.
이 길을 ‘한용운의 길’이라 해도 될 것이다. 한용운 선생은 이 깊고 고요한 숲길에서 감성이 복받쳐 ‘님의 침묵’을 읊었을 것이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오늘 이 길은 그런 시상(詩想)을 떠올릴만한 ‘가을 길’이다.
백담사에서 출발한 지 1시간이 넘어 영시암에 도착한다. 조선시대의 학자 김창흡이, 부친이 임금으로부터 사약을 받자, 이곳에 은거하며 지은 암자다. 영시암(永矢庵)은 활을 떠난 화살처럼,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의미하는 말이다.
김창흡은 여기서 6년간 머물며, 이곳의 적적한 풍경을 “즐겁기도 하지만, 슬픔이 서린다”고 읊었다. 이 시간의 영시암은 절집의 나무그늘 밑에 등산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왁자지껄 점심을 먹는 야외식당이다. 사람들이 떠나면 깊고 깊은 골짜기에서 외롭게 사색했던 김창흡의 풍경으로 돌아갈 것이다.
◇ 영시암~봉정암 7.1㎞ “폭포마다 탄성, 봉정암에서 광활한 설악 풍경에 감격”
영시암을 지나면 곧 오세암과 봉정암으로 갈리는 삼거리가 나오고, 봉정암 방향으로 20분쯤 가면 수렴동대피소다. 밑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여기부터가 문제야!” 하며 신발끈을 조이고, 위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이제 힘든 길은 끝났어!” 하며 털썩 주저앉는 곳이다.
여기부터 구곡담(九曲潭)계곡이다. 아홉 개 굽이마다 깊은 물웅덩이가 있다는 이름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계곡의 상류는 거칠고 가파르다. 암반과 바위들은 모가 나고 울퉁불퉁하며, 물길은 좁아지고 흐름은 빠르다. 산 위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낙석이 다행히 등산로 난간 옆에 멈춰 있다. 절벽을 바라보니 여기서는 손톱만한, 실제로는 지붕만한 바위 부스러기들이 암벽에 간신히 붙어, 어서 독립을 하고 싶다고 채근하고 있다. 설악산은 살아있고, 계속 진화하고 있다.
여기부터 산 색깔도 달라진다. 초록이 많았던 수렴동계곡에 비해 이제 노랑, 갈색, 빨강이 많아지는 컬러풀한 풍경이다. 단풍은 나무가 겨울을 나기 위해 자기 몸을 잘라내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인데, 사람들은 그 과정을 즐긴다. 나무가 아닌 사람으로 태어난 게 얼마나 큰 다행인가!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몇 개의 폭포를 지나서, 절벽의 굽이와 높이와 물보라가 대단한 관음폭포를 지나, 기다란 철계단을 숨 가쁘게 올라서면 쌍룡폭포가 나온다. 두 개의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서 한 웅덩이로 떨어지는 두 줄기 폭포다. 수량이 많을 때의 폭포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솟구치는 것으로 보인다. 두 마리 용이 힘차게 바위를 휘감아 오르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이들이 바위봉우리가 되었을까? 용의 이빨처럼 하늘을 향해 솟구친 용아장성(龍牙長城)이 저 위에 버티고 있다.
쌍룡폭포에서 가파른 길을 헉헉대며 오르다가, 이름 없는 폭포를 넋 놓고 바라보고, 또 오르고, 거의 수직으로 난 데크계단을 한참 올라서니 해탈고개라고 별명을 붙인 이정표가 나온다. 봉정암까지 500m는 깔딱고개라는 뜻이다. 아니 지금까지도 깔딱고개였는데 얼마나 더 깔딱해야 하는 길이란 말인가?
경사는 더 가팔라지고, 돌계단 높이는 더 높아지고, 체력은 바닥났고, 저멀리 하늘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네 발로 엉금엉금 올라가는 할머니들 중에서도 리더인 할머니가 “파딱 와라!, 다 왔따~, 진짜다~” 라고 기를 불어넣는다. 이미 저 할머니들은 모두 해탈하셨을 것이다.
용대리에서 출발한 지 6시간 넘어 봉정암에 도착했다. 마지막 1시간의 고행 끝에 나타난 봉정암이 얼마나 반갑던지 엄숙한 절이 아니라 동화의 나라처럼 보였다. 봉정암(鳳頂庵)은 봉황이 알을 품을 자리에 들어선 절이라는 뜻이다. 종무소 마루에서 올려다보면, 암자를 내려다보는 길쭉한 바위 위에 둥그런 바위 하나가 봉황의 알처럼 떨어질 듯 말 듯 얹혀있다.
부처님의 진짜 사리(舍利/유골)를 보관하고 있는 봉정암은 기도발이 좋은 명당으로 꼽혀 전국의 신도들이 순례를 오는 절이다. 젊은이들도 힘들어하는 장거리 등산로를 할머니들이 사력을 다해 올라오는 기도처다.
종무소에서 예약자인지 확인받고 번호표를 받아 숙소에 들어가니, 방 하나에 양쪽으로 40명이 누울 수 있도록 하얀 선이 그어져 있다. 이 선의 폭은 매우 좁아서 자리가 꽉 찬다면 옆으로 누워서 ‘칼잠’을 자야 한다. 맨 안쪽에 자리 배정을 받은 사람이 나가려면 40개의 인체를 넘어가야 하고, 돌아왔을 때 자기 공간이 비어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절에서 누구에게나 미역국밥을 제공한다. 이 산꼭대기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고, 배설물을 받아주다니! 봉정암은 대단한 절이다.
봉정암이 불교신도들에게 성지인 것처럼, 봉정암의 ‘사리탑 언덕’은 등산객들의 성지다. 이 언덕은 설악산을 조망하는 최고의 전망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봉정암 입구에서 서쪽 뒷산을 200계단 오르면 5층 사리탑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기도터다. 기도 중인 분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발자국 소리를 죽여 바위언덕을 오른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랴. 설악의 절반 이상이 시야에 담기고, 설악에서 뻗어나간 세상이 우주 끝까지 펼쳐져 있다. 수많은 능선과 계곡이 그물처럼 얽혀내린 내설악을 한참 내려다본다. 왼쪽으로 귀때기청봉을 중심으로 웅장하게 빚어진 서북능선을, 오른쪽으로 우람하게 펼쳐진 공룡능선과 외설악의 바위덩어리들을 둘러본다. 몸을 돌려 우주선처럼 둥글게 떠있는 소청봉과 중청봉을 올려다본다. 바로 코앞에는 용아장성의 바위제국이 힘차게 솟구쳐있다.
우주처럼 넓고, 바다처럼 깊고, 강물처럼 넘실대는 풍경이다. 저 풍경이 그림이라면 그 종이에 젖고 싶고, 시라면 글이 되어 들어가고 싶다.
노을이 진다. 검은 산 테두리 너머가 벌겋게 물들더니, 곧 보랏빛, 선홍빛 붓질이 우주를 붉게 채색시킨다. 엄숙한 종교행사를 치루듯, 위대한 교향곡을 연주하듯, 역사적인 혁명을 완수하듯, 그렇게 설악산이 우주에 잠기는 의식을 넋 놓고 바라본다. 한 줌의 노을 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움직일 수 없다. <다음 주로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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