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 남쪽바다 벗삼아 뚜벅…각산 오르니 삼천포 쪽빛 넘실
남파랑길 35~36…각산~창선·삼천포대교~당항마을 22㎞ '가장 아름다운 길'
붉은 수채화 실안 노을길 카페 즐비…향토적 섬마을엔 500년 왕후박나무 장엄
- 신용석 기자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둘레길은 낮은 산길이나 들길,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어떤 지역의 둘레에 난 길이지만, 큰 오르막 없이 편하게 걷는 길이 쭉 이어진 길도 둘레길이라 부른다. ‘둘러 간다’는 의미도 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에 여기저기를 들려 이모저모를 살펴보며 가는 길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둘레길은 제주도의 올레길이다. 이후 지리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등 명산의 주변을 도는 길이 생겨났고, 서울 둘레길, 강릉 바우길, 부안 마실길 등 지역마다 자연과 명소를 둘러보는 길이 유행처럼 조성되었다. 급기야 대한민국 국토의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도는 4500㎞의 길을 열었으니, 바로 코리아 둘레길이다.
코리아 둘레길은 동쪽의 해파랑길(750㎞), 남쪽의 남파랑길(1470㎞), 서쪽의 서해랑길(1800㎞), 그리고 북쪽의 DMZ 평화의 길(530㎞)을 잇는 길이다. 하루에 20㎞씩 걸으면 약 8개월이 걸리는 장거리 트레일이다.
남파랑길은 ‘남쪽의 푸른 바다와 함께 걷는 길’이라는 뜻이다. 부산의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해남의 땅끝마을까지 총 90개 코스로 이어져 있다. 한려수도에서 다도해국립공원에 이르는 아름다운 바다와 섬, 해안풍경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깃든 향토적인 삶과 문화를 체험하며 걷는 길이다. 그중에서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창선-삼천포대교를 바라보고 통과하는 35, 36코스를 간다.
◇ 남파랑길 35코스 ; 삼천포대교-각산-실안 노을길 12.7㎞ "산에서 쪽빛 바다와 아름다운 길을 내려다보고, 바닷가에서 은은한 노을빛을 바라보다"
삼천포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남파랑 출발점으로 가자고 했더니 기사는 그게 어디냐고 묻는다. 기자가 내민 지도를 보고 5분 만에 삼천포대교 사거리에 내려주며 "다음부터는 '대방사 입구'라 카세요" 라며 기자를 나무란다. '남파랑길 사천 35코스'라는 안내판이 있지만, 좀 더 분명한 랜드마크가 있으면 좋겠다.
오른쪽으로 난 아스팔트 언덕길을 올라가니 길 옆에 대방사가 있다. 대방(大芳)은 이곳의 지명으로 '커다란 꽃'이란 뜻이다. '大雄殿(대웅전)'이란 한자 대신에 ‘큰법당’이라는 한글 현판이 붙어있어 친근한 느낌이 든다. 법당 옆에 하얀 부처님 조각상이 있고, 가까운 하늘에 여러 개의 케이블카 캐빈이 장난감처럼 지나간다.
가파른 아스팔트길을 10분쯤 걸어 등산로로 접어들고, 20분쯤의 오르막 끝에 각산산성에 도착한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려시대에 돌로 쌓은 성이다. 망루 옆의 벤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왼쪽, 오른쪽의 바다 경관을 조망한다. 안개가 어른거리지만 그림같은 바다 풍경을 다 가리지는 못한다. 망루 뒤의 평탄한 소나무 숲길로 들어서자 솔 냄새가 솔솔 풍겨 코는 좋았으나, 귀는 점점 더 불편해진다. 케이블카 소음 때문이다.
하필이면 등산로가 케이블카 노선의 거대한 지주 옆으로 통과한다. 웅웅~하며 다가온 캐빈이 지주를 통과하니 덜커덕, 쿵쿵, 크르렁 크르렁~ 하는 소음이 대단하다. 자연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산에서 기계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다 싶다. 다행히 길은 점차 케이블카 노선과 멀어지며, 15분쯤 오르니 각산 전망대가 나온다.
각산(角山/408m)은 용의 뿔처럼 생긴 산이란 뜻이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사진으로 수없이 보아왔던 '그림 같은 장면'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쪽빛 바다에 두둥실 뜬 푸르른 섬들, 그리고 가까운 섬들을 연결하는 다섯 개의 교량이 아름답게 조화된 풍경이다. 이 교량이 이어진 길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대상으로 선정되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바로 여기서 바라보는 뷰가 전국 최고의 '길 풍경'이다.
이 전망대는 두 개의 지리산을 바라보는 곳이다. 시선의 왼쪽에 통영의 사량도가 있고, 거기에 지리산을 바라보는 지리망산이 있다. 지리산을 전망하는 산이라는 이름이다. 거기서 바라보는 지리산이, 시선의 오른쪽 끝에 있는데, 오늘은 구름에 가렸다고 이곳에 근무하는 배인숙 해설사가 안타까워한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바다에 점점이 박힌 섬들과 들쑥날쑥한 해협들이 뭔가를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 저곳은 이순신 장군이 치열한 해전을 펼쳐 나라를 구했던 역사적인 장소다. 풍경의 끝에, 장군이 숨을 거둔 노량해협이 하얗게 반짝인다.
전망대 바로 위에 각산의 정상석과 봉수대(烽燧臺)가 있다. 연기(熢/봉)와 횃불(燧/수)을 피워 왜군의 침입을 알리던 통신시설이다. 정상의 허리를 돌아 10분쯤 능선길을 올라가면 산불초소와 전망대가 나오고, 그 밑에 정자와 송신탑이 있는 삼거리가 있다. 여기부터 5.2㎞의 기나긴 시멘트 임도를 걷는다.
어느새 케이블카 소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풀벌레와 새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귀가 편안해졌다. 중간에 작은 편백숲이 나온다.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내뿜는 나무다. 코를 힘껏 열어 최대한 많은 공기를 들이마신다. 임도의 모퉁이에서 과일도시락을 여니 벌과 파리류의 곤충들이 집합한다. 여기는 그들의 세상이므로 그러려니 해야 한다.
1시간 반쯤 걸었던 임도의 끝에 누리원이라는 자연장지(自然葬地)가 있고, 그곳을 통과해 도로로 들어서면, 곧 바다를 향해 큰 창을 낸 카페들이 나온다. 도로 오른쪽으로 산분령(山分嶺) 마을의 골목길을 쭉 내려가니 작은 포구에 작은 배들이 가득하다. 여기부터 삼천포대교까지 유명한 실안 노을길이 시작된다. 현재는 실안(實安)이라는 지명을 쓰지만, 원래는 노을이 너무 찬란해 눈을 뜨지 못할 정도여서 실안(失眼)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의 노을은 찬란하지 않다. 회색 구름 사이로 간신히 빛을 내민 한 조각의 노을이 섬 너머 하늘을 주황빛으로 약하게 물들일 뿐이다. 그 빛살이 너무 약해 바다를 붉게 물들이진 못하고, 그저 빛의 기운을 은은하고 잔잔하게 수면에 드리울 뿐이다. 몽롱하기도 하고 몽환적이기도 한 '푸르스름한 노을'이다.
노을길의 언덕마다 대형 까페와 리조트 시설이 즐비하다. 주말에는 파란 바다와 붉은 노을을 즐기는 관광객들로 만원이라 한다. 삼천포대교로 가는 길의 중간에 죽방렴(竹防簾)이 있다. 물살이 빠른 물길에 대나무 발을 설치하여 이곳에 들어온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시설이다. 여기서 잡은 멸치를 죽방멸치라 한다. 몸에 상처 없이 건져올리고, 비린내가 나지 않게 처리하여 고급 멸치로 분류된다.
◇ 남파랑길 36코스 ; 삼천포대교-단항마을-당항마을 9㎞ "아름다운 바다와 서정적인 섬마을을 통과하는 소확행의 길"
삼천포대교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에 숙소를 나섰으나 잿빛 바다와 하늘에 해무가 뿌옇다. 흐릿한 여명이 사량도 너머를 잠시 불그스레하게 물들이더니 곧 구름의 회색빛에 흡수된다.
삼천포대교 입구에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표지가 있다. 어디가 아름다울까? 두리번거리지만 교량은 육중한 철골구조물에 불과하다. 아! 저곳이 아름답구나! 교량에서 바라보는 레고 장난감 같은 부두와 하얀 건물들, 잔잔한 바다를 오고가는 배들이 그리는 하얗고 가느다란 물거품, 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푸른 섬들과 빨간 등대, 초양도와 늑도의 언덕 아래에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어촌의 빨간 지붕들, 반짝이는 초록물을 가르며 출항하는 고깃배들... 이곳 아니면 볼 수 없는 다양한 풍경들이 쓰윽 쓰윽 지나가는, 발걸음을 멈추고 계속 뒤돌아보는 '예쁜 풍경들'이다.
삼천포대교에서 모개섬-초양도-늑도를 거쳐 네 번째의 주황색 교량을 넘으면, 이제부턴 남해군 구역인 창선도다. 교량 시점에서 40분쯤 걸렸다. 초소 직전의 노란 표지판에 "어서 오시다, 여기부터는 남해바래길과 같이 갑니다"라는 글이 있다. '오시다'는 ‘오세요’의 사투리고, '바래길'은 남해의 어머니들이 해산물을 채취하러 다녔던 갯벌길을 말한다.
초소 앞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을 따라 섬의 가장자리를 걷는다. 해발 10m도 안되는 곳이지만 이른 아침의 덤불숲은 컴컴하고 인적이 없어 기분이 묘하다. 10분쯤 걸었을까, 숲 속에서 갑자기 "크르렁~!" 하는 소리를 내며 후다닥 자리를 피하는 소리가 들린다. 멧돼지다! 잔뜩 긴장되었지만, 나도 "어허~!" 하고 최대한 굵고 우렁찬 기합소리를 냈다. 멧돼지는 어디선가 "크르르르~" 하는 낮은 경고음을 계속 보냈다. 숲이 작아서 더 도망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겉으론 의연하게 걸었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는 3분이 30분처럼 느껴졌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오솔길은 다시 도로를 만나 마을로 이어진다. 이번엔 쌩쌩~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 때문에 긴장한다. 보도가 없기 때문이다. 섬마을은 재래식을 개량한 집과 새로 지은 펜션형 건물이 반반이다. 농토도 경작지와 묵밭이 반반이고, 검은 밭에서 마늘을 심는 어르신들이 연신 허리를 굽힌다. 허리가 굽지 않을 수 없다.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게 시골풍경이다. 다만 이따금 나타나는 모텔건물들이 마을풍경을 해치고 있다.
단항마을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하마터면 왕후박나무를 지나칠 뻔했다. 남파랑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높이 9.5m, 폭 15m(추정), 나이 500년이 넘는 거목이다. 이순신 장군이 쉬어갔다는 나무 그늘에서 그늘맛을 보다가, 나무를 벗어나며 멀리서 보니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작은 숲으로 보인다.
달개비, 맥문동, 나팔꽃 등의 ‘시골 꽃’들이 드문드문한 시골길을 걸어, 큰 도로를 건너 기나긴 임도로 올라선다. 강아지를 앞세워 아침 운동을 나온 어르신에게 “귀엽네요!”라고 인사를 하니, 나이가 14살이라 한다. '귀여움'을 잃지 않은 노견이다. 임도의 고개를 넘어 내려가는 길 주변은 온통 고사리밭이다. 3번 국도를 건너, 바닷가에 납작 엎드려 자리한 당항마을에서 남파랑길 36코스의 절반 트레킹을 마친다.
코리아 둘레길은 있던 길을 연결한 길이다. 즉, 걷는 사람의 입맛에 맞는 길이 아니라, 그 길에 나를 맞추어야 하는 길이다.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즐기고, 그곳의 삶과 생활을 존중하며 걷는 '소확행의 길'이다. 더 친근하고 정감적인 길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가성비 높은 여행자숙소, 혼자 가도 반겨주는 식당, 장소를 추억할 스토리가 더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경제’가 따라올 것이다.
stone1@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