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따뜻하다…서용선 개인전 '내 이름은 빨강'
아트선재센터서 10월22일까지
- 김일창 기자
(서울=뉴스1) 김일창 기자 = 베이지색 면바지 밖으로 꺼내 입은 연보라색 남방에 나이키 스니커즈를 신고 가벼운 차렷자세로 서있다. 큐레이터가 자기 작품을 설명하는 수 분 동안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간간이 얼굴만 움직일 뿐이다. 하얀 머리카락만 아니라면, 뒷모습은 마치 청년 아니 소년같다.
선이 굵은 작품이 어둡다. '붉게 충혈된 눈'이 전시장을 들어선 관람객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내 솔직하고 아프고 따뜻하다. 우리 모두 자신만 아는, 남에게 들키기 싫은 내면 깊은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당황스럽고 두려운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연민으로 변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소년같은 작가는 '사람-도시-역사'를 중심에 두고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서용선 작가의 개인전 '내 이름은 빨강'(My Name is Red)이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15일 개막한다. 서용선은 작품에서 빨간색을 많이 사용하나 한 번도 '빨강'을 전시 제목으로 사용한 적은 없다. 그리고 그에게 빨강은 뜨겁고 부정적인 것이 아닌 '순수함'이다. 전시명은 그래서 작가 자신의 순수함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
전시명은 1591년 오스만 제국을 배경으로 전통과 서구의 갈등이 회화와 화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오르한 파묵의 소설 'Benim Adım Kırmızı'(내 이름은 빨강)에서 따왔다.
이번 전시는 서용선의 작품 세계를 '서베이'하는 성격이 짙다. 미술관 전관에서 펼쳐지는 전시는 △골드 △블랙 △나-비(추후 개막, 9월15일~10월22일)로 구성된다.
'골드'에서는 서용선 회화의 중요 공간이 도시를, '블랙'에서는 사람과 정치, 역사, 생명의 의미를 탐구한다. 마지막 '나-비'에서는 보편적 세계를 향한 작가의 의지와 예술과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1부 '골드'에 걸린 작품 '숙대입구'(1991년)는 서용선이 작가와 대학 강사로서의 생활을 병행하면서 집과 작업실, 대학 사이에서 보이는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대중교통을 타고 강북에서 강남으로, 강남에서 강북으로 매일을 이동하면서 본 '서울'이란 도시와 살아가는 사람들을 모습을 담았다. 그에게 스며들었던 당시의 도시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은 2023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서용선은 스스로 도시와 사람이 작업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도시화되는 과정에서 인물 군상에 대한 탐구는 '도시에서', '거리의 사람들'과 같은 제목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작업에서도 드러나지만,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혹은 '남자' '여자' 등 제목의 인물화나 '갈등' '역사' 등 단어로 명명된 인물화에서도 나타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선으로 본다는 행위와 대상으로서 보여지는 것 사이에서 도시인은 부유한다.
2부 '블랙은' 인간과 정치, 역사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미대에 합격하고 계속해서 그린 자화상으로 시작해 개인의 탄생으로서 인간과 그 인간을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정치와 역사에 대한 서용선의 비판적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간이다. 계유정난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역사적 사건에 관한 작가의 탐구는 정치가 인간의 보편적 삶과 유리되어 어떻게 파국적 현재를 만들어 가는지 드러낸다.
아울러 한국 산업화의 표상으로써 탄광촌에 대한 경관 연구와 도시 및 도시인에 대한 작품을 대결시켜 근대성이 야기한 삶의 조건과 의미에 대해서 질문한다. 이는 절망과 현실 부정이 아닌, 정치와 역사 그리고 인간의 화해와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으로 마무리된다.
대표작 '빨간 눈의 자화상'(2009년작)은 붉은 눈으로 괴물화되는 인간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붉은색이 작가에게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색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세상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눈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치인'(1984년작)은 이번 전시작 중 가장 먼저 그려진 그림이다. 그림 속 네 명은 군인 출신으로 정치인화 되어가는 어떤 '사람들'이다. 좋지 않은 인상, 흔들리는 몸짓에서 '악함'이 '불쌍함'으로 다가온다.
최인훈 작가의 '하늘의 다리/두만강' 표지에도 나오는 1996년작 '돈암동·건널목'은 검정색이 주조색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검정은 서용선에게 빨강만큼이나 중요하지만 회화 전면에 드러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서용선 작가는 "90년대의 나는 긴장한 상태로 도시를 바라본 거 같다. 그래서 90년대 작품은 치밀한 면이 있다"며 "그러나 지금 도시를 볼 때 어떤 부분에서는 냄새까지도 느껴보려고 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90년대 작업과 2000년대 작업의 이런 차이를 보는 것도 이번 전시를 보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고 덧붙였다.
전시를 기획한 김장언 아트선재센터 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회화 세계를 서사적이고(the narrative) 구상적인(the figurative) 틀에 국한하지 않으면서, 형상적이고(the figural) 감각적인(the sensible) 세계, 즉 '회화적 공간'으로 재구성하고 서용선 회화의 급진성을 다시 이야기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10월22일까지. 유료 관람.
ick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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