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옷에 삼옷을 걸친, 그 마음으로…학고재 '의금상경'展

숨기고 절제하는 미의식, 한국 단색화의 정신…15명의 작가 55점 전시

학고재갤러리에서 진행중인 '의금상경'전 모습. ⓒ 뉴스1 김일창 기자

(서울=뉴스1) 김일창 기자 =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고 알리는 시대라지만 만나면 마음이 더 쏠리는 사람은 어딘지 점잖고 겸손한 사람이다. 겉이 화려하고 언행이 톡톡 튀는 사람 한걸음 뒤에 서서, 온화한 미소를 은은히 풍기는 사람에게 자꾸만 호기심이 생긴다. 만나도 별 말이 없지만, 알리지 않아도 드러나는 뛰어난 능력이 사람을 자꾸만 끌어당긴다.

이런 사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자성어가 있다. 바로 '의금상경'(衣錦尙絅), '비단옷 위에 삼(麻)옷을 걸쳤다'는 뜻을 지닌 2600년 전의 고대어이다.

'중용'(中庸)의 33장에서 한 차례, '시경'(時經)에서 두 차례 등장한다. 시경에서도 '위풍(衛風)' 편 고시 '석인(碩人, 높으신 님)'에서 그 뜻이 잘 나타난다.

이 시는 춘추시대 위(衛)나라 임금에게 시집가는 제(齊)나라 귀족 여성 장강(莊姜)의 덕성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키가 크고 늘씬하며 가녀리고 새하얗고 아름다운 귀족 여성이 국혼(國婚) 행사에서 비단옷 위에 삼옷을 걸친 것을 표현했다.

예를 다하면서도 백성들의 눈을 어지럽히는 것을 꺼려 비단옷을 삼옷으로 가렸다는 것인데, 이런 지도층의 태도는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후대 예술가들에게는, 특히 동양미학의 본보기가 됐다. 예를 들면 동양에서의 문장은 되도록 함축된 말로 표현했고, 그림은 '정신의 닮음'이라는 미덕을 정확한 재현의 법칙보다 숭상했다. 서예에서는 정신을 응축해 글자 안쪽 깊숙히 힘을 불어넣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여겼다.

따라서 의금상경이라는 말에는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는, 절제하는 미의식이 내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한국 단색화에서 '의금상경'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래서 낯설지 않다.

장승택 작가의 '겹회화' 작품들. ⓒ 뉴스1 김일창 기자.

학고재가 오는 2월25일까지 '의금상경'에 들어맞는 작가 15명의 작품 55점을 전시한다.

참여 작가는 1941년생이자 한국 단색화의 대표적 주자로 손꼽히는 최명영부터 1946년생으로 백색 회화의 거장이자 여백의 작가로 알려진 이동엽, 부친이자 시인인 박두진이 제시해준 '내일의 너'라는 화두를 회화의 명제로 삼는 박영하(1954~), 캔버스의 정면은 물론 측면도 강조하면서 붓을 대지 않고 푸른 빛이 배어나오는 기법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인현(1958~) 등이다.

또한 '옴니'(Omni) 연작으로 한국미술에 빛을 밝힌 작가 천광엽(1958~)과 겹회화(layerd painting)로 후기 단색화의 대표주자인 장승택(1959~), 오직 세계를 감싸고 사물을 관통하는 마음 자체를 나타내려 하는 김길후(1961~), 유일한 중국 작가이자 자연에 대한 무차별적 바라보기(无差别观看)를 실천하는 왕쉬예(1963~) 등도 동참했다.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받은 이래 가장 주목받는 설치미술가로 이번에 회화 작품을 내놓은 박기원(1964~)과 에폭시를 칼로 그어 물감을 바르고 다시 에폭시를 부어 굳혀서 칼로 긋고 물감을 바르는 지난한 과정에서 회화의 시각적 깊이를 구현한 후기 단색화의 대표 작가 김현식(1965~), 컴퓨터상의 노이즈를 확대해 회화에 재현하는 박종규(1966),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민초적인 혁필화(Rainbow Painting)의 기법으로 가장 혁신적이고 가장 엘리트적인 전자 자기장의 세계를 그리는 김영헌(1964~) 등도 함께했다.

그림을 대지라고 생각하고 캔버스에 대지와 숲을 가꾸는 박현주(1968~)와 어두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침묵'(Silence) 연작으로 깊이가 도드라지는 선형 회화를 선보이는 윤상렬(1970~), 몸으로부터 원천적인 욕망을 화면에 나타내는 박인혁(1977~)의 작품들까지 한국 단색화의 현재를 톺아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최명영 CHOI Myoung young, 평면조건 22-715 Conditional Planes 22-715, 2022, 캔버스에 아크릴릭 Acrylic on canvas, 130x130cm (학고재 제공)
이동엽 LEE Dong-Youb, 사이-여백 908 Interspace-Void 908, 1991, 캔버스에 아크릴릭 Acrylic on canvas, 162.2x259cm (학고재 제공)
이인현 LEE Inhyeon, 회화의 지층 Lepisteme of Painting, 2017,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80x240x10cm in 2 parts(3) (학고재 제공)
박현주 PARK Hyunjoo, 빛그림 41 INTO LIGHT 41, 2022, 캔버스에 안료, 혼합 재료 Pigment and mixed media on canvas, 162.2×130.3cm(3) (학고재 제공)

icki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