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싫어 하와이로 떠난 '사진 신부'…코끝엔 '지긋지긋한 낙원의 향기'
제주 포도뮤지엄 기획전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5일 개막
김희영 T&C재단 대표 총괄디렉팅…최태원, 인스타 '인증샷' 응원
- 조재현 기자
(제주=뉴스1) 조재현 기자 = '사진 신부'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20세기 초 미국 하와이에 노동이민을 간 남성과 서로 사진만 교환한 뒤 혼인한 여성을 일컫는다. 지금의 고등학교 2~3학년쯤 되는 나이다. 1900년대 초 600~1000명이 그렇게 조선 땅을 떠나 하와이로 갔다. 다들 그랬듯, 가난과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가 국내를 대표하는 미디어 작가 정연두의 손을 거쳐 관객과 만난다. 제주 포도뮤지엄에서다. 포도뮤지엄은 5일부터 내년 7월3일까지 기획전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를 개최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동거인 김희영 T&C재단 대표가 지난해 포도뮤지엄 개관전에 이어 총괄 디렉팅에 나섰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디아스포라와 세상의 모든 마이너리티'다. 다양한 이유로 자신에게 주어진 지리적, 정서적 영토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존재들을 주목하고,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너른 시선을 제안한다.
인천 제물포항에서 증기선을 타고 하와이에 도착한 사진 신부들이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다. 가난과 억압을 벗어나고자 했던 용기 있는 소녀들 앞에는 뜨겁고 광활한 사탕수수밭, 그리고 혹독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연두는 이들이 일생을 바쳐 일군 삶의 궤적을 따라가기 위해 제주도에서 직접 사탕수수를 키우며 지난한 노동의 과정을 몸소 체험했다.
그는 과거 하와이로 떠났던 소녀들과 비슷한 또래인 제주의 애월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과 8차례 워크숍(공동연수)도 진행했다. 사진 신부의 존재를 다각도에서 분석하게 된 정연두는 전시관 내에 본인이 키운 사탕수수를 옮겨 심었다. 애월고 학생 3명을 인터뷰한 영상도 선보인다.
또한 설탕공예를 배운 정연두는 설탕과 종이 등을 이용해 사진 신부들의 초상을 제작했다. 작가는 단단하고도 연약한 초상을 통해 이들이 견뎌냈던 낯선 땅의 외로움을 관객 앞에 재현한다.
초상이 전시된 공간에 가면 코에 신경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특유의 향기가 나기 때문이다. 이는 사진 신부들이 타국에서 매일 맡았을 싱그러우면서도 서글픈 사탕수수 냄새와 땀, 흙, 그리움의 냄새를 재현한 것이다. 포도뮤지엄은 이 향기를 만들기 위해 향초 브랜드 '꽁티드툴레아'와 협업했다.
4일 만난 김희영 총괄 디렉터는 "사진 신부들에게 지긋지긋했을 낙원의 향기를 구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포도뮤지엄에서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우고 론디노네의 '고독한 단어들'은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전시 개막에 앞서 최태원 회장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인증샷을 올려 관심이 높아진 작품이기도 하다.
론디노네는 포도뮤지엄 2층의 넓은 전시 공간에 제각기 다른 포즈를 취한 채 깊은 휴식에 빠진 27명의 광대를 배치했다. 무질서하게 놓인 것 같지만 사소한 소품의 위치까지도 직접 작가의 손길을 거쳤다.
화려한 옷차림, 화장과는 대조적으로 광대들은 지쳐 보인다. 자세히 보면 곳곳엔 얼굴 등엔 생채기도 났다. 마냥 유쾌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되레 애잔함이 드러난다. 이 광대들은 인간이 홀로 24시간 동안 고립됐을 때의 감정이나 삶의 양태를 대변한다.
론디노네는 이런 광대들에 낮잠, 한숨, 울음, 방귀, 앉다, 마시다, 듣다, 즐기다 등의 이름을 붙였다. 하나하나 외로운 섬처럼 눈을 감고 있는 광대들을 보고 있으면 오늘날을 사는 도시인을 모아놓은 듯한 느낌도 든다.
2층의 커다란 창문에 무지개색을 더해 낮에 건물 내부로 무지개가 들어오도록 한 '사랑이 우리를 만든다'도 론디노네의 작품이다.
론디노네가 포도뮤지엄 건물 옥상에 설치한 무지갯빛 네온 조각 '롱 라스트 해피'를 통해 빛이 사라진 시간 선명한 무지개도 만날 수 있다. 관람 순서상 마지막인 이 작품을 통해 다소 묵직한 주제를 전하는 전시를 위트있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게 포도뮤지엄 측 설명이다.
무지개는 성소수자인 작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이배경의 '머물 수 없는 공간', 리나 칼라트의 '짜여진 연대기', 알프레도 & 이자벨 아퀼리잔의 '주소', 강동주의 '땅을 딛고 바다를 지나'·'빗물 드로잉', 요코 오노의 '채색의 바다(난민보트)' 등 미디어아트, 설치, 회화, 영상, 조각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배경의 '머물 수 없는 공간'은 수많은 백색 육면체들이 유려하게 일렁이는 인공의 바다를 보여준다. 작가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무한히 멀어지는 파도를 통해 '경계'라는 공공한 개념을 허문다.
필리핀에서 호주로 이주한 경험이 있는 부부인 알프레도 & 이자벨 아퀼리잔이 만든 '주소'의 기본은 택배 상자다. 이 상자의 크기는 필리핀 우체국에서 해외로 물건을 보낼 때 세금이 면제되는 규격이다. 이들은 이 상자 140개를 이용, 한 사람의 삶이 빼곡히 들어있는 커다란 집을 집어 이주민 공동체의 고단한 삶을 표현했다.
포도뮤지엄은 개관전 때도 '테마공간'이라는 자체 기획 공간을 운영했다. 전시에 풍부한 서사를 부여하고, 현대미술을 보다 쉽고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번 전시 또한 '이동하는 사람들', '디파처보드', '아메리칸드림620', '주소터널',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라는 5개의 테마공간을 통해 전시 주제를 더 뚜렷하게 전달한다.
김 총괄 디렉터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 주류, 비주류로 구분되기 이전에 수많은 공통점을 가진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고자 마련한 전시"라며 "이를 통해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포도뮤지엄은 전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일본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무장애) 버전의 오디오가이드도 마련했다. 한국어 버전 녹음은 드라마 '파친코'에 출연한 배우 김민하가 맡았다. 개관전 중국어 도슨트로 인연을 맺은 아이돌 NCT 샤오쥔은 이번에도 참여했다.
포도뮤지엄 운영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화요일은 휴관이며 예매는 11번가와 네이버에서 할 수 있다.
cho8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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