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교회, 가톨릭에서 이탈해 새 시대를 시작하다 [역사&오늘]

12월 17일, 교황청, 잉글랜드의 헨리 8세 파문

헨리 8세. (출처: After 한스 홀바인, 유화(1540–1547),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538년 12월 17일, 교황 바오로 3세가 잉글랜드의 헨리 8세를 파문했다. 헨리 8세의 파문은 영국 교회의 독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헨리 8세는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자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는 새로운 왕비인 앤 불린과의 결혼을 통해 남성 후계자를 얻고자 했지만, 교황청은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외삼촌이었던 캐서린을 지지하며 헨리 8세의 요구를 거절했다.

헨리 8세는 교황의 반대에도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영국 의회를 설득해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을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선포했다. 이는 곧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결별을 의미했다.

헨리 8세의 파문은 영국에서 종교 개혁이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비록 헨리 8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종교적 자유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 후, 영국은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 영국 국교회를 확립했다.

영국 왕실은 교회의 권위를 넘어서 국가의 최고 권력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왕실은 수도원 해산 등을 통해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여 왕실의 재정을 강화하고, 귀족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이는 영국 절대왕정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종교 개혁은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종교에 적응해야 했고, 가톨릭 신자들은 박해를 받기도 했다.

헨리 8세의 파문은 영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사건은 영국 교회의 독립은 물론 국가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 유럽의 종교 개혁과 근대 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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