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에 죽음으로 항거한 대한제국의 대신 [역사&오늘]
11월 30일, 민영환 자결
- 김정한 기자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05년 11월 30일,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강탈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한 고종의 시종무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바로 충정공 민영환이다.
1861년에 태어난 민영환은 187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조정에서 여러 요직을 거치며 뛰어난 학문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그는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 미국, 영국을 경유하면서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했다.
이후 빈번한 외국 방문으로 서양 문물의 힘을 알게 된 민영환은 개화파가 되어 국가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민씨의 일원이었음에도 근대적인 개혁을 시도해 수구파인 민씨 일파의 미움을 받았고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그는 조약 폐기를 위해 애썼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더 이상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한 민영환은 결국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로 항거했다.
그의 유서에는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나는 한번 죽음으로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2000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라는 내용이 담겼다.
민영환의 자결은 한 시대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고, 국민들에게 저항정신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비록 살아서 나라를 구하지 못했지만,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후세에 길이 전해지며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2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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