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증오의 시작, 플라타이아 공성전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그리스 아테네에서 테베로 가는 길에 플라타이아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산과 평원이 만나는 지점, 2, 3부 능선 산기슭에 자리 잡은 조용하고 소박한 마을이다. 2019년 평일 점심 무렵에 방문했는데, 어찌나 조용한지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같았다. 마을 중앙 부분 도로 양쪽으로 식당이 몇 개 있었다. 그중 한 곳을 방문했는데, 주인 내외가 커피와 브레드란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즉 관광객은 한 명도 안 온다는 의미다.

하긴 전사적으로는 훨씬 유명한 마라톤 전적지의 위치를 마라톤 해변에 있는 식당에서 물었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 차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 식당의 온 가족이 모여서 난상토론을 벌였다. 4가족 중 아버지는 북쪽, 딸은 서쪽을 가리켰는데, 남자의 말을 따라야 할지, 젊은 쪽의 말을 들어야 할지 고민했었다. 보통은 전적지에 관한 남자의 말이 맞는데,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 딸의 말을 따랐더니 따님이 옳았다.

세계 사람이 들어는 본 적이 있는 마라톤 전투지도 이런데, 플라타이아 전투를 아는 사람, 안다고 해도 굳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역사에 남는 플라타이아 전투는 두 번이 있었다. 첫 번째는 기원전 479년에 벌어진 페르시아군과 그리스 연합군과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이 패배하면서 크세륵세스가 일으킨 최대 규모의 그리스 침공전쟁이 끝난다. 규모와 중요성에서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보다 못하지 않은 전투인데, 이상하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궁금증이 이곳을 방문한 이유지만,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을 전후해서 이곳에서 플라타이아인과 펠로폰네소스 동맹군 간에 전투가 벌어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과 전투는 여러 개가 있다. 플라타이아 전투도 그중 하나지만, 이 전투는 전쟁을 촉발시킨 도화선이라는 의미보다는 앞으로 벌어질 길고 잔인한 내전의 양상을 예고하는 예언적이고 상징적인 전투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적 의미도 그 어떤 전투보다 크다. 그 비감함도 이 황량한 유적을 찾아온 이유였다.

기원전 5세기에도 이곳의 지정학적 위치만 아니었다면 플라타이아는 결코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작은 폴리스였다. 그리스는 어떻게 보면 인삼처럼 생겼다. 유럽대륙에서 크게 3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발칸반도에서 다시 에게해를 향해 돼지 꼬리처럼 튀어나온 그리스 반도는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동쪽이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서쪽이 스파르타가 위치한 펠로폰네소스이다. 그 북쪽 중부가 테베가 있는 보이오타이아. 그 북쪽이 마케도니아이다. 플라타이아는 테베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으로 가는 도로가 교차하는 삼각지였다.

플라타이아는 테베에 가까웠다. 테베의 속령, 위성도시 정도에 딱 적당한 곳이었다. 테베도 그리스의 삼각주인 이곳을 통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타이아인들은 테베를 거들먹거리는 압제자로 여겼던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략적 입지를 십분 활용하기로 하고 아테네와 우호를 맺었다. 마라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자진해서 원병을 보내 마라톤 전투에 참여한 폴리스는 플라타이아 뿐이었다

페르시아 전쟁 후 그리스의 패권을 두고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긴장이 높아졌다. 3인자였던 테베는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었다. 동시에 플라타이아의 가치도 높아졌지만 가치라기보다는 이곳이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었다. 플라타이아 주민의 의견이 갈렸다. 가까운 테베 편에 붙어야 한다. 전쟁을 피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니다. 전통의 우방인 아테네에게 붙자. 전쟁의 위험이 있지만 아테네는 강하고 아테네가 패권을 차지하면 플라타이아의 위상도 달라질 것이다. 이때 벌어진 논쟁에 대해서 기록이 없지만 어떤 이는 이런 말도 했을 것 같다. 아테네가 승리하면 우리가 테베를 지배할 수도 있다.

두려워진 친테베파는 테베에 몰래 연락해서 내응을 약속했다. 기원전 431년 4월 야밤에 약 300명의 테베군 중장보병이 플라타이아 요새 내의 아고라에 불쑥 나타났다. 친 테베파가 성문을 열어준 것이다. 도시는 순식간에 점령당했고, 다들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플라타이아에는 친아테네파 주민이 많았고, 이들은 용감했다. 테베에 쌓인 한이 그처럼 많았던 것 같다. 주민이 봉기해서 테베군과 싸웠다. 테베군 200여 명이 살해되었다. 180명 정도가 내통한 플라타이아 주민과 함께 항복했는데, 흥분한 플라타이아 주민들은 이들을 모조리 살해해 버린다.

그리스인들은 같은 민족이란 의식은 있었기에 포로 살해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보통은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 것이 상례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 사건에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었지만, 이 사건이 국제적 화제로 비화하면서 양측이 전쟁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이미 전쟁 준비를 마무리하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준비했던 전쟁 플랜을 가동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란 30년 내전이 시작된다.

플라타이아는 아테네의 지원을 철썩같이 믿었지만,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세운 전략은 아테네는 육전은 포기하고 해전으로 승부를 건다는 것이었다. 그는 주민을 아테네 성 안으로 소개시켰다. 스파르타군은 추수철이 되기 전에 아티카로 출정해서 농토와 올리브나무를 불태웠다. 아테네는 해군을 보내 스파르타를 고립시켰다.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경제적 압박으로 상대의 전쟁수행 의지를 꺾는다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에 플라타이아 보호는 들어갈 틈이 없었다. 고대의 폴리스는 현재의 플라타이아 전방, 평원지역에 있었다. 평지지만 땅이 살짝 솟아올라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작은 하천의 지류가 흘러서 물공급이 되는 지역이었다. 이곳에 시가가 건설되고, 도심 중심 제일 높은 곳에는 요새를 쌓았다. 요새는 계란 형태로 남북이 440미터, 동서가 350미터쯤 되었다. 돌로 쌓은 성벽은 무너져서 정확한 높이를 측정할 수 없지만 석벽만이 아니라 제법 높은 언덕 축대까지 감안하면 높은 곳이 10m 정도도 된다. 성벽에는 치밀하게 치도 축조되어 있었다.

스파르타군이 아티카로 출정하면서 버림받은 플라타이아를 회유했다. 플라타이아는 거부한다. 아테네를 향한 의리 때문이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테네를 너무 믿었던 건 확실하다.

스파르타군은 플라타이아를 포위 공격한다. 공성전투 기록을 보면 마치 안시성 전투를 보는 것 같다. 공성 측은 토산을 쌓아 올리고, 수성 측에서는 지하터널을 파서 토산을 무너트리려고 했다. 화공을 시도했지만, 불바다 속에서도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무려 3개월이 넘는 포위 공격에도 플라타이아는 버텼다. 무한정 원정을 계속할 수 없었던 스파르타군은 테베군에게 포위를 맡기고 철수했다. 이들은 성 밖에 또 하나의 성을 쌓아서 플라타이아를 완전 봉쇄한다. 성 안에는 400여 명의 남자와 110명의 여성이 있었다.

다음 해에 절반 정도의 남자들이 포위망을 뚫고 아테네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아테네는 방관만 할 뿐이었다. 마침내 식량이 떨어떨어지자 플라타이아는한다. 스파르타는 공정한 재판을 약속했다. 투기디데스는 신기할 정도로 이 재판에서 플라타이아와 테베의 고발과 변호의 기록을 길고 자세하게 남겼다. 다른 이유라기보다는 내전이 주는 증오와 폭력의 징조를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재판은 형식이었고, 스파르타인들은 생존자를 거의 학살하고 여성은 노예로 삼았다. 페르시아 침공은 그리스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었지만, 누구를 지지하느냐 민주정과 과두정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는 이념은 그들을 다시 분열시켰다. 심지어 같은 폴리스 주민도 분열했고, 이익과 이념 앞에서 민족도 상식도 양심도 사라진다. 포로 살해, 주민에 의한 주민의 살해는 내전 기간 동안 새로운 상식이 되었다.

플라타이아 사건은 국제정치의 냉혹함, 혐오와 증오 정치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서막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누구도 이 징조를 깨닫지 못하고 전쟁에 돌입했다. 그 결과는 기껏 이룩한 그리스 황금시대의 영원한 몰락이었다. 이것이 오래전에 벌어진 남의 이야기일까? 이 시기에 벌어진 모든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과 너무나 똑같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힘들여 방문한 유적이었지만 그 황량한 모습은 내 마음을 더욱 황량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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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kmy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