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에 수류탄을 던져 조선 청년의 기개를 보여주다 [역사&오늘]

10월 10일, 이봉창 의사 순국

일왕 암살 결의식에서의 이봉창 의사. (출처: Unknown author, 사진(1931),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32년 10월 10일, 이봉창 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의거를 일으킨 사건으로 순국했다. 향년 32세였다.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봉창 의사는 청년 시절에는 성공을 위해 완벽한 일본인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일본을 동경하고, 열심히 일본어를 익혔고, 심지어 3.1 운동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1925년에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도 얻었다.

하지만 1928년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에 참석하려다가 제지를 받고 유치장에 갇힌 사건을 겪으면서 그의 생각은 180도 변했다.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일왕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단지 한글 편지를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감금됐다가 즉위식이 끝난 다음에야 겨우 풀려났다.

이봉창 의사는 유치장 안에서 자신이 일본인이 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31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처음에는 워낙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일본식 몸짓이 배어 있어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까지 받았다.

하지만 김구의 신뢰를 바탕으로 그는 일왕 암살이라는 자신의 계획을 밝히고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됐다. 그는 1931년 12월 13일 일왕 암살 결의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 도쿄로 떠났다. 이듬해인 1932년 1월 8일 그는 요요키 연병장에서 만주국 황제 푸이와 관병식에 참가 중인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하지만 명중에 실패해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같은 해 9월 30일 일본 법원은 비공개 재판을 열고 이봉창 의사에게 대역죄 혐의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10일 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됐다. 해방 후인 1946년 김구가 일본 정부로부터 그의 유해를 돌려받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삼의사' 묘에 윤봉길 의사 등과 함께 안장했다.

acene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