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쿠르스크 악몽의 전차전②

<strong>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strong>

◇ 지옥으로 뛰어들라고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소련이나 독일이나 합리적 지휘관들은 독일군이 쿠르스크를 점령한다고 해도 모스크바로 달려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재자가 아니라고 해도 독일 기갑부대 앞에 특별한 방어지형이 없는 평원이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는 길이 편안할 수는 없다. 2023년 프리고진과 바그너 반란군이 모스크바 행진을 시도했던 루트가 바로 이 길이다.

스탈린은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게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이 결정에 힘을 보태주었다. 공산주의자이며 파시즘을 혐오했던 몇몇 독일 엘리트들이 자발적으로 암호명 루시 린(루돌프 뢰슬러)을 수장으로 하는 스파이그룹을 조직하고 소련에 정보를 제공했다. 영국의 필비 5인방처럼 이들은 군부의 작전, 보급 등 다양한 부분에 포진해서 영양가 있는 정보를 모았다. 그중에 쿠르스크 공격 계획이 있었다.

쿠르스크 공격은 대치국면이 되면서 이미 실패한 것이었다. 스탈린의 우려로 휴지기에 소련은 이 돌출부를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100만의 대군과 3000대가 넘는 전차를 수용할 참호와 전차호가 개설되고, 철조망, 지뢰, 기관총, 십자화망으로 보호하는 다중방어선이 설치되었다. 루시린의 첩보는 5월, 독일군에게 작전 계획서가 보급되기도 전에 소련군 사령부에 전달되었다. 소련은 이제 확신을 가지고 방어전에 더욱 매진할 수 있게 된다.

독일군은 항공정찰로 쿠르스크가 요새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고 있었다. 히틀러에게 아부하거나 지극히 머리가 이상한 지휘관을 빼고 만슈타인, 구데리안, 발터 모델, 호프, 독일의 전설적인 지휘관들이 모두 공격에 반대했다. 그러나 용감하게 히틀러에게 도전할 지휘관은 많지 않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지휘관은 아예 없었다. 그저 제안을 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나마 한 번 제안을 하고 설득이 되지 않으면 입을 다물었다.

히틀러는 고집을 꺾지 않았지만 본인도 속으로는 흔들리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이후로 히틀러는 군부에 지휘권을 넘겨 주지도 않았지만, 결단력이 흔들렸다. 종합적 분석력과 판단력에 스스로도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된 그는 한두 가지 명분에 집착했다. 이번 경우는 양보다 질에 대한 확신이었다. 전차생산 책임자가 된 구데리안이 쿠르스크 공격에 반대하면서 티거와 판터는 아직 미완성품이라고 혹평하자 히틀러는 충분한 전차를 확보하기 위해 공격을 연기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암호명 시타델이라고 명명된 쿠르스크 공격은 4월에서 5월로 최종적으로는 7월로 연기되었다.

이건 최악의 결정이었다. 그 사이에 소련군의 병력은 보강되고 쿠르스크 돌출부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해갔다.

◇ 티거, 불멸의 전차

영국 보빙턴에는 세계의 명전차를 전시하는 전차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 최고의 소장품이 티거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세계 유일의 티거 전차로 1년에 한 번 이 전차가 기동하는 날은 축제의 날이 된다. 이 박물관에 특별 전시실이 딱 2개가 있는데 하나가 영국의 자랑 세계 최초의 전차라는 MK1 전차실과 티거실이다.

당시 제법 강력한 중전차도 20-30t이던 시기에 60t에 달하는 이 괴물은 미군 셔먼탱크의 약한 전차포는 바로 앞에서도 튕겨내고, 500m 밖에서는 어떤 전차포도 막아낼 수 있는 120㎜ 전면장갑과 사거리 2km에서도 어떤 강력한 전차 장갑도 파괴할 수 있는 전설적인 대전차포였던 88㎜ 포를 주포로 장착하고 있었다. 티거의 약점이 느린 속도라는 평이 있는데, 제원상의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평소에는 느리게 움직여야 했고, 티거의 중량을 버텨낼 도로와 교량이 부족해서 기동에 제약이 많았다.

판터는 티거보다는 가벼웠지만 역시 중전차였으며, 경사장갑을 채택하고 역시 티거보다 경쾌한 기동으로 전술적 가용력은 티거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히틀러의 구상은 기갑전력을 집중하고 무적의 신형전차를 앞세워 적의 방어선을 돌파해서 전선을 통째로 붕괴시킨다는 쐐기작전이었다. 소위 전격전의 전형적인 전술이다.

T-34는 출현 당시에는 세계를 놀라게한 혁신적인 전차였다. 경사장갑을 채택해서 방호력을 높였고, 서스펜션을 도입해서 놀라운 속도와 기동력을 보였다. 간결한 설계로 생산효율을 극대화했다. 장갑과 속도 외에 편의장비, 승무원의 안전에는 소홀했던 것이 단점이었지만, 소련은 승무원의 수를 기본 5명에서 4명으로 줄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전차의 성능 조건으로 기동력을 제일로 꼽던 독일의 전차병들이 T-34에 놀라고 찬사를 보냈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무게는 26.5t, 주포인 76㎜ 포는 티거 이전까지는 어떤 전차도 파괴할 수 있었다.

T-34가 늑대라면 티거는 이름 그대로 호랑이였다. 1마리의 호랑이가 10마리의 늑대를 해치운다는 발상이었다. 실제로 이후로 독소전쟁 내내 벌어진 전차전에서 티거는 10배의 소련 전차를 거침없이 격파하는 놀라운 전과를 곧잘 보여주었다. 이런 전과가 티거의 명성을 전설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승부가 전차의 성능만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다. 그 정도로 압도적 성능은 아니었고, 티거도 결점이 많았다. 10:1의 전적비는 독일군 전차 승무원의 역량과 훈련, 성장할 기회를 주지 않는 소련군의 경직되고 밀어붙이기식 전술탓이 컸다. 전차가 작전 지역에 투입되었을 때, 소련 전차병들은 사전에 충분한 지형을 숙지 하지 못했고,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들은 지시받은 지점으로 기계적으로 이동했고, 해치를 닫고 싸우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며, 기초적인 응용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 독일군 전차장들은 중동전쟁 때의 이스라엘군처럼 해치를 열고 시야를 개방하고 싸웠다. 적을 먼저 발견하고 지형을 먼저 파악해서 속도가 느려도 기동력에서 우위를 점할 때가 많았다. 전차장의 희생이 컸지만, 전쟁영웅 오토 카리우스는 해치를 닫고 싸웠으면 전차와 승무원이 더 많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 돌파와 반격, 그리고 결말

독일군은 크루거의 중부집단군을 북부에서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을 남부에 배치했다. 작전 개념은 북쪽에서 해머로 내려쳐서 전선을 요동시키면 남부에서 돌출부의 뿌리 부분을 가위로 자르고 올라가는 개념이었다.

해머는 발터 모델의 제9군이, 가위는 호프의 제4기갑군과 켄프의 작전집단군이 맡았다. 소련군의 진지는 대단히 잘 설계되어 있어서 그곳으로 돌입하는 것은 말 그대로 킬링존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었다. 게다가 독일군의 돌파부대는 강력하기했지만 돌파전면이 좁았 좁았기 때문에 그만큼 집중공격을 받을 수가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양측 공군도 역대급 규모로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쿠르스크 전투라면 흔히 전차전을 연상하지만, 공중전도 살벌하게 벌어졌다. 땅 밑에서는 지뢰가 터지고, 하늘에서는 폭탄이 측면에서는 포탄이 작열하는 가운데, 전차와 병사들은 좁은 회랑을 따라 참호가 겹겹이 놓여 있는 다중방어선을 돌파해나가야 했다.

피를 토하며 목표지점에 도달해도 전선 뒤에는 소련이 비축해 둔 풍부한 예비대가 있었다. 이들의 반격은 거셌고, 물러서지 않았다. 독일군의 기대와 달리 돌파를 해도 좌우 측면의 소련군이 추풍낙엽으로 무너지지 않았다. 결국 모든 전투는 모두가 재로 화하고 전투력이 소진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양측의 승부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독일군은 보통 10배, 5배의 전력이 필요하다는 전술의 정석을 깨고, 요새화된 방어진지에 적보다 더 적은 병력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럼에도 끝끝내 최초의 목표지점에 도달하긴 했지만, 병력의 절반을 손실하고 전투력이 바닥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반격을 버텨내고, 소모시켜서 양측의 전력이 다 같이 소진되었다.

남부전선에서는 약간은 다른 형태 혹은 복잡한 형태로 전투가 전개되었다. 만슈타인은 빛나는 전술 능력으로 공격과 방어를 좀 더 신축성 있게 해 냈다. 호프의 4기갑군에 소속된 SS 부대는 악명만큼이나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한다.

전선이 좀 더 역동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양측이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양상은 변함이 없었다. 7월 12일 마침내 대규모 기갑전투가 벌어진다. 독일군 전차가 294대, 소련군 전차가 793여대였다. 양측에게는 죽을 때까지 싸워라 안되면 들이받아 자폭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기갑백병전이라고 벌인 이 죽음의 대결은 결국 죽음의 대결로 끝났다.

90만의 독일군은 가공할 전투력을 보였다. 100만의 소련군은 무서운 투지를 보였다. 양측의 지휘관은 모두가 더 이상 남은 병력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전투가 끝났다.

쿠르스크 전투만 보면 승부는 무승부라고 할 수도 있고, 독일이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고도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독일의 좌절이자 전세 역전이었다. 쿠르스크 후방에 싱싱한 소련 집단군이 대기하고 있었고, 이들이 공세로 나선다.

결국 독일군은 전 전선에서 수세로 돌아서고, 밀리게 된다. 1943년 말 소련군은 우크라이나로 진입하게 되고, 11월에 키이우(키에프)를 탈환했다. 쿠르스크는 독일의 실패로 끝났지만, 그곳에서 싸운 지휘관과 병사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이상의 투지와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어떤 찬사도 그들의 무모한 희생을 위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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