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여인천하…측천무후②
◇ 측천무후, 남편 고종과 함께 묻히다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중국 시안에서 좀 떨어진 외곽에 당 고종의 건릉이 있다. 넓은 평원에 말 안장처럼 솟아오른 2개의 양산 봉우리를 연결해서 산 전체를 능으로 조성했다. 능의 규모, 조경, 조각, 당나라 전성기의 능력과 재력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능 위라고 해야 할지, 산 정상이라고 해야 할지, 정상에 올라가면 중국의 전형적인 황토지형이 만든 대지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아래에서 봐도 위에서 봐도 황제의 권력과 위용이 절로 느껴지는 곳이다.
이 위용에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도 일조했기에 우리에겐 아픈 교훈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인 고종의 맘도 편치는 않을 것이다. 측천무후는 이 건릉을 조성하면서 자신도 고종과 합장했다. 그래서 건릉은 엄밀히 말하면 고종과 측천무후, 2개의 왕조, 2명의 황제의 합장릉이다.
건릉 앞에는 17살에 남편인 무연기(무승사의 아들)과 함께 무후에게 강제 자살을 명령받았던 중종의 딸, 영태공주의 묘가 있다. 이 묘는 개방되어 무덤 안까지 들어가 볼 수 있다. 건릉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여기에서 출발한다. 고종, 무후, 영태공주의 무덤은 엉뚱한 질문을 던져 준다. 가족 화해의 장일까? 비극과 원한의 비정한 연쇄일까?
이 능을 보면서 측천무후가 자식도 죽였지만, 그래도 고종은 남편으로 존중해 주었다고 해석한 역사학자도 있었다. 정말 그럴까? 무후가 별도의 능을 세웠더라면 산산조각으로 파괴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감각은 탁월했던 무후는 자신은 절대권력을 누렸지만, 그 권력이 대대로 이어지게 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미리 보험을 들어놓았던 건 아닐까?
그 미스터리가 풀릴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건릉이다. 건릉은 도굴되지 않은 몇 안 되는 황릉 중 하나이다. 입구를 너무나 교묘하게 감춰놓았던 탓에 근래에 들어서 그것도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 안에 있을 보물들, 서적들, 고종과 무후의 관의 배치 등은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알려줄 있을 것이다. 덕분에 수많은 역사학자에게 희망고문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수십 년 내로 발굴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발굴 기술이 완전해질 때를 기다린다는데, 이건 과학기술의 발전이 멈추는 날이라는 말과 동의어라 기약이 없다. 뭐 100년 내로 발굴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능을 파헤치지 않고 DNA까지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될 수도 있다.
정치인으로서 측천은 대단한 능력가였다. 여자라는 핸디캡, 별도의 정치적 기반이 없었음에도 황제 자리에서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70세가 되자 그녀도 죽음을 예감했고,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이미 나라 이름도 '주'로 바꾼 상황, 무후의 조카인 무승사, 무삼사는 자신을 황태자로 삼으리라고 기대했다. 이때 적인걸을 포함한 한 줌 남은 당나라의 충신들이 반대했다. 아들을 두고, 조카에게 왕위를 넘길 수 없다. 무후는 양보했다. 유배했던 노릉왕(중종의 동생)을 소환해서 황태자로 삼았다.
705년에 무후는 세상을 떠났다. 중종이 권력을 되찾고 즉시 당나라로 복구했다. 무후는 건릉으로 가서 고종의 아내로 돌아갔다. 무후의 마지막 양심이었을까? 아니다. 국가의 중심권력은 특별한 파벌로 존재한다. 민주사회가 되고, 시민들이 관료가 되는 오늘날에도 정가의 권력집단은 꿀로 빚은 경단처럼 뭉쳐 있다.
안 그런 나라가 없다. 선진국이란 나라들, 정의롭다는 나라들도 한번 분석해 보면 세습, 친구, 이웃 사람, 심지어 심부름꾼까지 가관이다. 독재국가나 민주국가냐는 파벌의 존재나 혈연, 군대, 동창 같은 파벌의 구성 원리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그 사회의 민도와 수준에 의해 그 파벌집단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차이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런 파벌의 중심에는 뭔가 정당한 명분을 지닌 사람이 있어야 한다. 어제까지 변방의 장수였던 사람, 심지어 양치기, 도적의 두목이었던 사람이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해서 왕이 된다. 그는 힘과 피로 권력을 쟁취했는데, 그의 아들과 손자가 권력의 정당한 구심점이 된다? 필자가 평생 역사를 연구하면서도 미스터리한 부분인데, 이 이상한 정당성은 일종의 집단적 타협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만물을 근원까지 회의하면 남아나는 것이 없다. 금이 왜 가치의 기준이 되어야 할까? 선거로 선출된 사람은 왜 지위를 보장받아야할까? 다수의 의견은 왜 존중받아야 할까? 다수가 정의라면 소크라테스의 처형이나 갈릴레오의 재판은 다 정당하지 않는가?
이상하든 비합리적이든 그 정당한 명분이 될 수 있는 세력을 무후는 모조리 숙청했다. 당 황실, 공신집단, 심지어 자신의 일족까지 그리고 그 빈 자리에 소위 능력형 행정가와 사냥개형 충복들로 채웠다. 무후는 이 두 세력의 견제와 운영을 기가 막힌 솜씨로 해냈다. 덕분에 무후의 폭정은 잘난 권력가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고 백성들은 편안하고 좋은 세상을 보냈다. 백성 기준에서 무후는 훌륭한 군주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렇기는 한데 정치의 불안은 결국은 백성에게 전가된다. 무후의 자신의 명분이 부족했기에 코어 세력을 숙청하고 자신이 유일한 코어가 되었다. 새로운 코어를 키우자니 자신에게 위협이 되었고, 방치하자니 넘겨줄 코어가 없었다. 이것이 무후가 여생을 황제로 살고 죽어서는 고종의 아내로 돌아간 이유였다.
◇ 두 번째, 세 번째 여인천하
중종이 복위하자 이번에는 무후에게 극도의 탄압을 받았던 중종의 황후 위씨가 권력을 잡았다. "한번 여성이 전권을 장악하자 그 여파가 멈추지 않았다." 권위 있는 중국사 전문가는 이렇게 서술했다. 이건 여파가 아니라 필연이었다.
권력 기반이 없는 황제에게 가장 가까운 권력 핵심은 외척이다.(이건 한나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변함없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고아나 다름없는 황제이다 보니 황후에게 다시 권력이 모였다. 측천이 하던 역할을 위황후가 했다. 측천의 딸로 온갖 권력을 누리던 태평공주 역할을 위후의 딸 안락공주가 이어받았다.
측천의 폐위를 주도하다가 처참하게 숙청당한 상관의의 손녀 상관완아는 측천에 의해 관비가 되었다. 중종은 그녀를 복권시켜 후비로 삼았다. 중종이 위후를 견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무후의 일족은 당장 숙청했을 것 같지만, 중종도 위후도 그럴 수는 없었다. 새로운 코어라지만 갓 태어난 연약한 알과 같았다. 잔존 세력들은 서로 견제하며 의지해야 했다. 무후가 당 황실의 복구를 허락한 것도 저들이 차마 자신의 일족을 숙청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견제하고 대립하며 너희들끼리 승부를 내라.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치의 천재였다.
위황후, 무씨 일족, 상관완아, 팽팽하던 기싸움은 엉뚱한 곳으로 화살이 미쳤다. 710년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힘을 합쳐 남편이자 아버지인 중종을 독살했다. 그리고 중종의 아들 이중무를 후계로 세웠다. 이것은 형실일 뿐이다. 위황후 자신이 무후의 방식대로 여황제가 되어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의도였다.
위황후는 무후를 베꼈지만, 그녀의 능력은 베낄 수 없었다. 이때 당 황실의 마지막 남은 힘, 예종의 아들인 임치왕 융기가 봉기해서 궁을 습격한다. 융기는 위황후와 안락공주, 상관완아를 모조리 죽이고 아버지 예종을 즉위시켰다. 2년 후에 예종은 아들 융기에게 양위한다. 이 융기가 당나라 현종이다.
위황후 세력을 숙청한 현종은 태평공주도 죽이지만, 남은 무씨와는 손을 잡았다. 그의 황후가 무씨였다. 궁중의 파벌이 일소되자 현종에게 권력이 모였다. 특히 무후 시대에 중용된 실무관료들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당이 여인천하에서 벗어나자 중흥기가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인천하나 현종의 시대나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적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기이해 보이는 이 모든 현상은 권력의 속성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역사의 교훈이다.
이후로도 실권을 누린 황후는 많다. 하지만 여황제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이때의 경험으로 권력을 코어를 구성하는 방식, 국가에 운영에 참여하는 관료군의 구성원리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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