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레미제라블'과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신문 국제면을 넘기다가 귀퉁이 기사의 두 줄짜리 제목에 눈이 고정됐다.
'군함까지 출동해 으르렁…프랑스·영국 어업권 갈등'
부제는 이렇게 뽑혔다.
'프랑스, 영국령 섬 단전 위협…영국은 현장에 군함 2척 급파'
나는 제목과 부제를 보고 틀림없이 '그 섬'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사이좋은 영국과 프랑스가 섬의 어업권 문제로 갈등하고 있다면, 그 섬밖에 없다.
기사를 읽어내려간다. 문제의 '그 섬'은 기사의 열 번째 줄에 등장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해군 순찰함 두 척을 영불해협의 저지섬 인근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저지섬(Jersey island).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이 전하는 기사는 저지섬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이어간다.
'저지섬은 영국 영토지만 영국보다는 프랑스 노르망디 연안에 가깝다. 저지섬 인구는 약 10만명에 달한다. 지난 1월 EU와 완전한 결별한 영국은 저지섬 인근 해역에 프랑스 어선이 접근할 수 있는 허가를 개별적으로 내주겠다는 방침을 정했고, 이에 따라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저지섬은 전력의 95%를 해저 케이블을 통해 프랑스에서 공급받는다. 프랑스 해양부 장관이 저지섬에 전기 공급을 끊을 수도 있다고 위협한 배경이다.
왜 노르망디인가?
노르망디만 하면, 우리는 1944년 6월6일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떠올린다.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단숨에 바꾼 세계사적 상륙작전이 오마하 해변을 중심으로 노르망디 해안에서 전개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배경으로 다룬 영화는 여럿이지만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 5분만큼 상륙작전의 치열함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영화는 없다.
노르망디(Normandy). 영국해협에 면한 프랑스 북서부의 지역. 지금은 프랑스 영토인 노르망디는 유럽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관문이다.
근원적인 질문. 왜 지명이 노르망디인가? 주로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사는 북게르만족을 노르망족이라고 한다. 흰 피부, 노랑머리, 큰 키로 상징되는 사람들. 노르망족이 주로 피오르에 모여 살다 보니 '협만(峽灣)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바이킹으로 불렸다.
항해술에 능한 노르망족은 고기잡이와 해적질로 살아나갔다. 바이킹족은 서쪽으로 나아가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신대륙에 도착했고, 동쪽으로 강을 따라 내륙으로 진출해 862년 노브고로드공국을 건설한다. 이것이 러시아의 기원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남쪽 바다로 내려간 일단의 바이킹이다. 9세기 프랑크왕국이 분열되면서 세력이 약해지자 바이킹이 정복 활동에 나선다. 바이킹은 프랑스 북부의 날씨 좋고 비옥한 땅을 차지해 911년 이곳에 노르망디공국을 세운다. 물산이 풍부한 이곳에 살면서 바이킹은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프랑스에 동화된다. 바이킹이 받아들인 프랑스어를 노르망어라고 한다. 프랑스 땅에 정착해 세력을 키운 바이킹 후예들은 비록 언어는 프랑스어를 받아들였지만 타고난 정복자 근성을 억누르진 못했다.
1066년 윌리엄은 바다 건너 영국을 침공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앵글로색슨군을 괴멸시킨다.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노르망디의 영국 지배의 시작. 노르망디 지배층은 1204년까지 장장 140년간 영국 왕을 배출했다. 노르망디 혈통의 영국 왕들은 동시에 노르망디의 공작을 겸직했다. 이민족이 왕실의 주류가 되면서 영어에 노르망어와 프랑스어가 스며들었다. 영어발달사(史)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노르망디 만(灣)의 크고 작은 섬들을 해협 군도(Channel islands)라고 한다. 저지섬은 해협 군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면적 118㎢, 인구 10만8000여명이다. 두 번째로 큰 섬은 건지(Guernsey)로 면적 65㎢, 인구 6만2800여명이다.
저지와 건지는 영국 왕실령이다.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치정부로 독자적인 재정·법률·사법체제를 갖고 있다. 주요 언어는 영어이고, 프랑스어와 노르망어가 사용된다. TV는 영국 방송을 시청하고 자체 신문을 발행한다. 통화는 파운드화. 영국은 두 나라가 안보 문제가 있을 때만 관여한다. 존슨 총리가 군함 파견을 명령한 배경이다.
Jersey와 Guernsey의 'ey'는 옛 노르망어로 섬을 뜻한다. 저지섬은 반도에서 불과 22㎞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저지와 건지는 영연방 올림픽경기인 커먼웰스 게임에도 독자적으로 출전한다. 두 섬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침략을 받아 4년여 지배를 당했다. 그러다 1945년 5월9일 해방된다. 5월 9일은 두 섬나라의 해방 기념일이다.
나폴레옹 3세의 핍박으로 망명길에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로 가본다. 1848년 혁명으로 루이 필립 왕이 물러나고 제2공화국이 탄생한다. 시인·극작가·소설가인 빅토르 위고는 국회의원에 재선된다.
이어 실시된 대통령 선거.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대통령에 출마한다. 자유를 확대하고 정의를 바로세우겠다는 공약을 내건 루이 나폴레옹을 위고는 열렬히 지지한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은 태도를 돌변해 억압 정치를 시작한다. 이어 1851년 12월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해 중앙집권적 독재체제를 옹립하고 황제 자리에 오른다. 스스로 나폴레옹 3세라 칭한다.
배신감을 느낀 위고는 나폴레옹 3세를 공개 비판한다. 위고가 앞장서 반대하자 나폴레옹 3세는 즉각 체포 지시를 내린다. 위고는 변장을 한 채 파리를 탈출한다. 위고는 국경을 넘어 벨기에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다. 브뤼셀에 거처를 잡은 위고는 나폴레옹 3세에 대한 공격을 이어갔다. 나폴레옹 3세를 조롱하는 '꼬마 나폴레옹'이라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난감해진 것은 약소국 벨기에. 이 사태를 방관했다가는 자칫 나폴레옹 3세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었다. 벨기에 국왕은 위고에게 벨기에를 떠나 달라고 간곡하게 청한다.
위고는 두 번째 망명지를 채널 해협의 영국 왕실령 저지섬으로 정한다. 1852년 8월, 위고와 가족이 항구에서 여객선에 오르자 많은 시민들이 부두에 나와 작가를 환송했다. 위고는 멀리 프랑스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 거처를 마련했다.
저지섬은 신변이 보장되는 곳이어서 대륙의 반체제 인사들의 단골 망명처로 유명했다. 그는 저지섬에서도 나폴레옹 3세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그의 원고가 파리 신문에 실릴 때마다 신문은 불티나게 팔렸다. 그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꼬마 나폴레옹'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되자 영국 왕실 입장에서도 위고의 존재가 껄끄러워졌다.
1855년 그는 망명지를 저지섬보다 북쪽에 있는 건지섬으로 옮긴다. 건지는 프랑스에서 더 멀리 떨어진 섬으로 면적은 저지의 절반 크기. 세인트 피터 항구 근처에 오트빌 하우스를 빌렸다. 찾는 이 드문 작은 섬에서 그는 모처럼의 여유를 즐긴다. 틈틈이 해변을 거닐며 데셍을 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파리에서 시작만 해놓고 전혀 진척이 없었던 장편 대하소설을 집중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3세는 온갖 회유를 했지만 작가는 자유를 억압한 정권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망명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독자들은 그의 작품을 더 소비했다. '파리의 노트르담'을 비롯해 작품들이 폭발적으로 팔려나갔다. 그는 인세만으로 부자가 되었다.
그는 잠자고 산책하는 시간을 빼놓고 소설 집필에 매달렸다. 외딴 섬이다보니 이것이 가능했다. 오트빌 하우스 생활 6년이 지났을 무렵인 1861년 6월30일 그는 마지막 문장을 썼다. 그리고 파리의 시인에게 편지를 썼다.
"오늘 아침 8시30분 창문 너머 비쳐드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나는 '레미제라블'을 끝냈다네. 이젠 죽어도 좋아."
원고는 마차·선박·기차 편으로 여러 날 걸려 파리의 한 출판사에 전달되었다. '레미제라블'은 1862년 파리에서 출간되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곧바로 영어로 번역되었다. 위고는 마침내 문호의 반열에 올랐다. 불멸(不滅)이 되었다.
'레미제라블'을 끝낸 뒤 그는 건지섬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다. 1866년에 세상 빛을 본 '해변의 노무자들'이다. 영국령 건지의 목가적 풍경을 세상에 알린 최초의 소설이다. 그가 총 19년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파리로 돌아간 것은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한 나폴레옹 3세가 물러난 후다.
위고가 섬을 떠난 지 12년 뒤 프랑스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가 이 섬을 찾았다. 르누아르는 여름 한 철을 보내며 1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위고와 가족이 살던 오트빌 하우스는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위고를 사랑하는 이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영순위 공간이다. 이 박물관의 관리 주체는 프랑스 파리시(市).
영국과 프랑스의 어업권 갈등으로 생각지도 않게 영불해협의 저지와 건지를 떠올린 것은 집콕 시대에 큰 호사(豪奢)다. 그 덕분에 15년간 건지섬 곳곳에 남긴 문호의 시간을 서울에서 상상했다.
조지 오웰을 취재하면서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던 주라(Jura)섬. 조지 오웰이 피를 토하며 '1984'를 써낸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의 외딴 섬. 건지섬은 주라 섬과 함께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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