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훈장 받은 '친일파 예술인' 9명이나…누군가 봤더니
무용 조택원 등…예술기관장 등 해방 후 '꽃길' 걸어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부여된 서훈 취소돼야" 비판 거세
- 박정환 기자, 김아미 기자
(서울=뉴스1) 박정환 김아미 기자 = 8·15 광복 72주년을 맞아 문화예술계의 '친일 명부'가 다시 회자하고 있다. 새 정부 정책과제 1호인 '적폐 청산'의 기조 속에 청산되지 못한 '가장 오래된 적폐' 중 하나로 꼽히는 일제강점기 친일 예술인이 받았던 국가 훈장이 논란이 되는 것이다.
15일 문화예술계에 따르면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2009년에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5명 중에서 최고 등급인 금관문화훈장을 최초로 받은 무용가 조택원을 비롯해 문화훈장을 수훈한 인사는 모두 9명에 달한다.
반민규명위는 2005년 5월 대통령 직속으로 출범했다. 일제강점기 1기(1904∼19년) 106명, 2기(1919∼37년) 195명을 각각 2006년과 2007년 발표한 데 이어 2009년 일제강점기 막바지인 3기(1937∼45) 704명을 발표해 총 1005명을 확정한 뒤 해산됐다.
1005명 중 문화 분야는 총 84명이며 문학 31명, 학술 20명, 연극 10명, 음악 10명, 영화 7명, 미술 4명, 무용 1명, 야담 1명 순이다. 민족문화연구소가 지난해 대한민국 서훈 72만 건을 분석한 자료를 검토한 결과, 친일파 문화예술인 84명 중에서 모두 9명이 국민훈장과 문화훈장 등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국민훈장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적을 세워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최고 영예인 무궁화장을 비롯해 △모란장 △동백장 △목련장 △석류장 등이 있다. 또 문화훈장은 문화·예술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 문화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등급은 금관 은관 보관 옥관 화관 순이다.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친일 예술인 9명은 무용 조택원, 음악 현제명·홍난파, 연극 서항석·유치진·이서구, 미술 김기창·김은호·김인승 등이다. 이들 친일 예술인의 친일 행적과 해방 후 활동을 정리했다.
◇ '춤추는 내선일체'…조택원
조택원(1907~1976)은 최승희와 쌍벽을 이룬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 현대무용가다. 그는 예술인 중 처음으로 문화훈장 중 최고 등급인 금관문화훈장을 1974년에 받았다.
그는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 4월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총독부 후원을 받아 '부여회상곡'(夫餘回想曲)을 부민관에서 발표했다. '백제의 수도 부여가 내선일체의 발상지'라며 식민지 정책을 찬향하는 내용의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중국, 만주, 몽고 등 국내외에서 1000회 이상 공연됐다.
해방 후 그는 1947년 10월 한국을 떠나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생활하다가 1960년 귀국해 정착한다. 이때부터 그는 창작보다는 무용행정과 진흥사업에 주력해 1960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1961년에 설립된 국내 최대 무용단체인 한국무용협회 고문을 맡다가 2년 뒤인 1963년에 2대 이사장을 1년동안 잠시 역임했다. 이후 1974년부터 국립극장 운영위원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전신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무용개발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 '군국주의의 풍각쟁이'…현제명·홍난파
성악가이자 가곡 작곡가 현제명(1902~1960)은 1943년 경성음악연구원 창설 이후 경성음악대학교(1946년)를 거쳐 국립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1946년 8월)를 창설한 주역이다. 그의 일본 이름은 구로야마 즈미아키(玄山濟明)이다. 그는 해방 후 1960년 사망할 때까지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고 서울대 예술대학 음악학부 초대 음악부장으로 활동했고, 예술원 종신회원(1954년) 등 '화려한 삶'을 살았다. 그의 이력은 '음악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했다고 인정돼 사후 5년 뒤인 1965년 국민훈장 모란장에 추대됐다.
현제명은 1937년 조선문예회 활동을 통해 '천황폐하 중심의 일본정신을 뚜렷이 함으로써 시국인식을 고취하고 황군을 격려한다'는 취지 아래 '가는 비' '서울'(이상 최남선 작시), '전송'을 작곡해 발표했다. 그 후 해방 전까지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총력조선연맹문화부 등 친일단체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음악을 통해 황민화를 앞당기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 각종 음악회에서 일본의 승리를 바라는 독창을 부르기도 했다.
'고향의 봄', '봉선화' 등을 작곡한 홍난파(본명 홍영후, 1898~1941)는 일본 이름이 모리카와 준(森川潤)이며 해방을 맞기 전인 1941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현제명과 같이 사유로 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1965년에 추대했다.
일각에서는 홍난파가 1937년 6월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이후 강압에 의한 가짜 친일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조선총독부가 '황민화'와 '사회교화'를 목적으로 만든 관변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같은해 5월에 가입했음이 알려져 이런 주장의 타당성이 떨어진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이후 홍난파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며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글과 노래들을 발표했다.
◇ '친일 국민극의 선구자들'…서항석·유치진·이서구
연극 분야에서는 이서구(1899~1981)가 국민훈장동백장(1970년)과 보관문화훈장(1977년)을, 서항석(1900~1985)이 문화포장(1962년)과 국민훈장 모란장(1973년)을, 유치진(1905~1974)이 문화훈장 모란장(1962년)을 각각 받았다.
유치진은 1905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중 연극에 뜻을 품고 귀국해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했다. 주로 농촌의 현실 문제에 초점을 맞춰 치열한 리얼리즘 정신을 구현한 희곡을 써 우리나라 근대극의 문을 열었다.
일각에서는 유치진 등이 일제의 강제동원에 의한 소극적인 협력을 했다며 이들의 업적을 재조명하려 하지만, 그의 친일 행위는 현대극장을 중심으로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평가가 아직까지 지배적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후기인 1941년부터 4년 동안 현대극장을 창립해 친일파를 찬양하거나 내선일체와 일제의 만주침략을 정당화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서항석도 유치진과 함께 현대극장에서 활동했으며, 이서구는 조택원과 함께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가 직접 휘로를 쓴 무용극 '부여회상곡'의 대본을 쓰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유치진은 해방 후 초대 국립극장장을 비롯해 예술원 추천위원, 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 한국문학가협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서항석은 유치진에 이어 2대 국립극장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국악원 이사장(1960년) 서울시 문화위원회 부위원장(1965년) 등을 역임했다. 이서구는 해방후 서울시청 공보실장으로 근무했으며 방송인협회 이사장(1966년)과 방송작가협회 이사장(1974년)을 차례로 맡았다.
광화문 촛불집회 때 '시민과 함께하는 뮤지컬 배우들'을 이끈 변정주 연출가는 "아직도 친일 인사인 극작가 유치진 등이 한국 연극계의 초석을 쌓은 분으로 칭송받고 있다"며 "공연계가 좁다보니 다들 건너 건너 아는 선배고 후배고 하니 잘못한 것을 비판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연극사 재평가 작업이 꽤 오래 걸리고 힘들겠지만 지치지 않고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화필보국'(畵筆報國)…김은호·김기창·김인승의 '친일 행적'
미술 분야에서는 한국화가인 이당 김은호(1892-1979, 일본식 이름 쓰루야마 마사시노기)와 운보 김기창(1913-2001), 그리고 서양화가 김인승(1910-2001)이 반민규명위가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면서 대한민국 훈장을 수훈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승무도' 연작으로 유명한 이당 김은호는 뛰어난 인물 묘사 실력으로 대한제국 순종황제 등의 얼굴을 그리면서 이름을 얻었다. 20대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적이 있으나 1920년대 후반 일본에서 유학하며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히면서 친일본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친일 여성단체인 '애국금차회'가 미나미 조선총독에게 금비녀(금차)를 바치는 모습을 표현한 '금차봉납도'를 제작하는 등, 태평양전쟁 시기 '화필보국'(畵筆報國)의 이름으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적극 협력했다.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해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 작품을 심사하거나 전시하는데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뚜렷한 친일행적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심사위원을 맡는 등 화단의 중심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장, 1962년 서울시 문화상, 1965년 3·1문화상,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76년 5·16민족상 등을 받았다.
이당으로부터 사사하고 '바보산수' '바보화조'라는 채색화로 독자적 예술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는 운보 김기창 역시 친일 미술인으로 기록돼 있다. 운보는 24살 때인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연 4회 특선 경력으로 27살에 선전 추천작가가 됐다. 이후 광복 전까지 주로 일제의 '내선일체' 사상을 정당화하는 친일 행적을 이어갔다.
1942년에서 1944년까지 일제강점기 말에 친일 미술전인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일본화부 추천 작가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 중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며 학도병 자원을 부추긴 그림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를 비롯해 '성전'에 참여한 병사의 멸사봉공 의지를 표현한 '총후병사' 등이 대표적 친일 작품으로 꼽힌다.
운보는 1940년 10월 조선남화연맹전, 1943년 애국백인일수전람회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협력한 이력도 있다. 1977년 은관문화훈장을 비롯해 1981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서훈받았으며, 200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이 밖에도 예술원상(1983), 서울시문화상(1986) 등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대표적 사실주의 서양화가이자 '장미 화가'로 불리는 김인승 역시 친일 미술인으로 분류된다. 1932년 도코미술학교에 입학해 유화를 전공한 그는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성 인물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나부'로 최고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태평양 전쟁 시기 그의 인물화에도 정치색이 묻어나기 시작하는데, 일본군 간호병을 묘사한 수채화인 '간호병', 전쟁 지원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 등이 대표적 친일 작품들로 꼽힌다.
김인승은 반도총후미술전에 김기창, 심형구 등과 함께 추천 작가로 이름으로 열렸고, 어용 친일 단체였던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를 맡기도 했다.
김인승 역시 적극적인 친일 행적이 있었으나, 친일 청산 문제가 흐지부지되면서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 교수로 임용되고 이후 학장까지 지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국전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맡으며 한국 화단의 대부로 각인됐다. 문화포장, 예술원상, 서울시문화상, 3·1문화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 수상·수훈 경력도 화려하다.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친일 예술인 9명을 비롯해 친일반민족행위자 44명의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위원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기초로 행정자치부의 조사결과 해방 이후 정부 서훈을 받은 자는 총 44명이며, 수여된 서훈은 78건에 달한다"며 "서훈 사유가 된 공적이 아무리 뛰어나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공적은 결국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을 뿐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부여된 서훈의 취소가 매우 미흡해 44인 중 서훈이 취소된 것은 단 5명(5건)에 불과"하다며 "하루빨리 서훈 취소 결정이 내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또 "의원실 자체 조사결과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서훈을 수여받은 인원이 기존에 파악된 44명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분석되는 만큼, 더 철저한 조사를 통해 더 광범위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서훈취소를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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