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제의 먹거리 이야기] '태풍과 호박'
(서울=뉴스1) 전호제 셰프 = 가을의 불청객은 태풍이었다. 번호를 매겨가며 오던 것이 올해에는 아직 상륙한 태풍이 없다.
태풍은 매년 채소 가격을 들썩이게 한다. 올해는 아직 태풍이 없지만 푸른 야채 가격은 지난해에 비해서 오름세이다.
특히 애호박의 소매가는 개당 거의 3000원 정도다. 작년엔 1000원 정도면 살 수 있었으니 가격이 대폭 올랐다. 잦은 비와 폭염으로 생육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애호박 가격은 기후 영향이 크다.
뜨거운 여름 날씨에 애호박은 여름 피자로 많이 쓰곤 했다. 얇게 썬 애호박과 가지를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로 그릴에 구워낸다. 이 위에 짭조름한 바질페스토를 뿌리고 상큼한 방울토마토를 올리면 청량감이 있는 여름 피자가 된다.
여름이 지나면서 기온이 내려가지만, 바닷물 수온은 늦게 떨어진다. 태풍은 뜨거운 바닷물을 에너지 삼아 우리나라까지 온다.
태풍이 올 때쯤이면 애호박보다 단호박 인기가 오른다. 따뜻한 단호박 수프나 라떼는 찬바람과 함께 사람들이 찾게 된다.
태풍이 오면 바닷물은 위, 아래가 크게 뒤집히고 해수온이 떨어지기 시작하곤 했다. 바닷물색이 변하는 걸 보면 꼭 하늘빛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태풍이 몰아치면 제주의 비행장 근처 식당들은 사람들로 북적이곤 했다. 연착된 비행기를 기다리기에 근처의 식당은 마치 공항 대합실처럼 변한다. 비가 거의 옆으로 떨어지고 대형 유리 창밖은 파도와 바람으로 모든 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따뜻한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한다.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면서 굳이 팔팔 끓여 달라는 분들도 생긴다.
그날의 수프는 아마도 단호박이었을 것이다. 10월이 넘으면 항상 단호박을 많이 손질해 준비해 두고 수프를 끓이곤 했다. 하얀색 그릇에 노란색 수프는 어두워진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것 같았다.
흑백 화면 같던 바깥 풍경이 잦아들면 하나둘 짐을 들고 자리를 뜬다. 빨리 태풍의 섬을 벗어나고 싶었을까.
현재 일하는 서울의 식당에서는 태풍이 없어 장사를 공치는 날이 없었다. 그렇지만 태풍이 있던 작년보다도 매출이 줄었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집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함께 제주에서 일하던 분과 마주친 것이다. 서울에 볼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간단한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눈빛을 마주하고도 몇 마디 말을 못 나눈 게 아쉬웠다.
태풍이 없는 요즘에 가끔 제주도에서 맞던 강풍이 기억난다. 하늘을 휘젓는 바람 소리까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추위 속 먹던 따뜻한 호박수프도 문득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shef7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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