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제의 먹거리 이야기] '뜨거운 야구장의 김치말이 국수 '
(서울=뉴스1) 전호제 셰프 = 야구를 안 본 지는 꽤 오래됐다. 예전 내가 아는 선수들은 거의 은퇴를 한 것 같다. 일터가 잠실야구장과 가까워서 퇴근쯤 야구장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8월 마지막 더위가 한창이라 지하철 문이 열리면 뜨거운 열기가 차 안으로 몰아치곤 했다. 분홍색, 연청색 응원복을 보면 내가 느끼는 더위를 모르는 듯 여유가 있어 보였다. 옷 구석구석에 광고 문구를 다닥다닥 붙인 응원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일에 치여 사는 내 인생에도 숨을 틔워주고 싶어 딸과 함께 볼 야구 경기를 예매했다. 야구장에서 뭘 먹으면 좋은지 친구에게 물어보니 치킨을 주문하라고 했다. 좀 오래전 기억이라는 전제가 마음에 걸렸다.
경기 날에도 더위는 꺾이지 않아 걱정됐다. 과연 이 더위에 야구 경기가 가능한가도 싶었다. 경기장에 자리를 잡고 원둘레로 늘어선 각종 카페와 식당들을 둘러봤다. 기온은 35도를 넘어 등에선 땀이 흘러내렸다.
경기 시작 전 오후 6시에 3루 좌석에서는 서쪽 태양이 아직 뜨거웠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땀을 닦고 양산을 폈다. 집에서 가져온 과일은 이미 푹 익어 버렸고 보랭 통의 찬물도 벌써 미지근했다. 편의점에서 얼음팩을 사서 딸의 보랭 통에 채워주었다.
먹을 것을 주문해서 경기장에 입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장 인기 있는 식당은 의외로 삼겹살 구이를 파는 곳이었다. 마침 내 옆자리의 야구팬이 삼겹살 구이와 김치말이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내 눈으로 쏟아지던 태양 빛은 이제 서서히 사라졌다.
앞에 있던 중년여성 팬은 시원한 커피 음료 배달을 받는다. 그러고 보니 내 좌석 손잡이는 큐알코드가 있어서 경기장 내 업소에서 배달주문이 가능했다.
30년 전 내 기억의 한자리에는 야구장은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 운동장이다. 이곳에는 잠실야구장이 생긴 후에도 가끔 프로야구 경기가 있었다. 이곳 매점은 마치 기차역의 매점처럼 여러 가지 상품을 팔았다.
당시 함께 갔던 친척 형님은 프랑크소시지를 주문했다. 반찬으로 만들어 먹어야 할 것 같은 이것을 바로 뜯어먹었다. 입에서 오도독 터지던 시원한 햄의 맛에 마치 생고기를 먹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 야구장은 매점이 유일한 식음료 판매 장소였다. 또 주류 반입과 판매가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왜냐하면 경기에 몰입하여 경기를 방해하거나 선수단을 공격하던 일도 많이 발생하곤 했기 때문이다.
20년 전 미국에 머물 때 친구가 살던 클리블랜드라는 곳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친구의 부모님은 감사하게도 내게 메이저리그를 볼 기회를 만들어주셨다. 분위기는 매우 차분했고 웅장한 경기장과 함께 음향시설도 물론 좋았던 것 같다.
지금 그 야구장은 내게 핫도그를 먹었던 곳으로 기억된다. 생양파가 가득한 가운데 따뜻한 육즙이 투둑투둑 터지며 배어 나왔다. 관중들은 여유 있게 경기를 관람하고 자기 삶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요즘 우리나라 야구장은 미국보다 훨씬 활기가 넘친다. 예전의 과격한 응원은 사라지고 열정과 매너만 남았다. 또 여성용 화장실은 가장 가까운 위치로 남성의 두배로 만들어 기다리는 줄이 늘어지는 법이 없었다.
경기 내내 펼쳐진 응원가에 나도 모르게 그걸 흥얼거리게 됐다. 상대편 응원석에서는 응원가에 맞춰 연신 대형 물총으로 한여름 달궈진 열기를 식혀주고 있었다.
응원단의 댄스와 구호에 맞춰 경기를 보다 보니 어느덧 어둠이 깔리고 야구장 조명은 선명해졌다. 경기장은 한결 선선해져서 젖은 수건을 목에 두르고 경기를 관람했다. 오늘 응원하는 팀의 마지막 이닝이 끝날 무렵 식당으로 나와 김치말이 국수를 주문했다.
얼음 동동 떠 있는 육수에 갈증이 풀리고 몸이 시원해졌다. 김치말이 국수를 다 먹을 때쯤 되니 경기가 끝났다. 내가 응원하던 팀이 패했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선수만큼 흥을 돋워 주었던 응원단도 팬들에 잠시 둘러싸여 기념 촬영을 해주고 있었다.
휴대전화에는 노란색 폭염주의보 문자가 가득 와 있었다. 몸은 땀에 젖어 있었지만 내 마음에는 시원한 김치말이 국수처럼 일주일을 시작할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져 있었다.
야구장의 조명은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오늘 들었던 응원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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